[Opinion] 어느 하루, 조제의 앞에는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시각예술]

글 입력 2017.03.2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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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흉흉한 소문이 돈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할머니가 있는데, 그 유모차 안에 수상한 것이 있단다. 츠네오는 호기심을 느끼지만 이내 관심을 꺼두기로 한다. 그러다 우연히 유모차 속 소문의 수상한“것”을 마주한다. 유모차 안에 틀어박힌 여자, 조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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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할머니는 장애를 가진 그녀를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움의 몫은 이내 조제에게도 전달되고 조제의 세상은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빛을 잃는다. 조제의 유일한 취미라고는 다락에 들어가 할머니가 주워온 책을 읽고 가끔씩 유모차에 숨어 산책을 나가는 게 다 일뿐. 사랑하는 책의 주인공 이름을 빌려와 스스로를 “조제”라고 부르는 조제의 진짜 이름은 쿠미코. 그녀는 츠네오에게 자신을 조제라 소개한다. 그녀가 사랑해 마지 않는 인물인 조제를 자신의 이름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겉보기에 조제는 만남과 이별에 담담한 사람이다. 그러나 조제는 제대로 된 만남과 이별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성숙하지 못한 태도를 보일 뿐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책의 주인공인 조제는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는 캐릭터로 나오는데, 조제는 책의 주인공인 “조제”의 모습을 모방한다. 갇힌 세계에서 쌓아 올린 것들은 대부분 그렇다. 무언가를 모방함으로써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경험한 것은 없으니 말이다. 이제 조제의 작고 투명한 우물 속으로 츠네오가 들어온다. 할머니 외에는 이렇다 할만한 관계를 맺은 적 없는 조제에게 츠네오는, 호랑이나 물고기 같은 존재다. 어쩌면 평생을 보지 못했을(치환해서 말하면 관계 맺지 못했을)존재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아닌 츠네오와 나온 바깥은 조제가 경험했던 날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날이다. 숨어있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 조제와, 조제를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츠네오. 조제의 사막 같은 삶 속으로 서서히 비가 내린다. 여기서 말하는 비는 어떤 부정적인 우울이나 슬픔의 형사화가 아니다. 비는 정화(淨化)의 몫으로 나타난다. 조제의 버석한 모래들이 씻겨져 나간 자리에는 풀꽃이 자라나는 들판이다. 사막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푸른 초원의 바탕인 것이다. 이제 조제의 세상은 햇빛 가득하고 때때로 비가 내리는 평범한 날이다. 이 날은 단 한번도 꿈꾸거나 바라지 않았던 조제의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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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평생 진짜 호랑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어.
 
 호랑이 우리 앞에서 츠네오의 손을 잡고 말하는 조제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러나 조제는 호랑이를 피하거나 호랑이에게 소리지르지 않는다. 옆에 선 츠네오의 손을 잡는 것으로 공포를 극복한 것이다. 어쩌면 호랑이는 조제에게 있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공포의 형상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할머니의 애증 같은 감정들,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상’이라는 이름의 하루들. 조제는 그 모든 것들에 맞서는 용기를 얻는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의 “함께”라는 이름을 통해서.
 
 소설 속 주인공 “조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영화는 성장 로맨스 같은 판타지를 그리지 않는다. 영화는 흘러 1년이 지난 어느 날로 도착한다. 그곳에 있는 것은 전과 같지 않은 츠네오와 조제뿐이다. 조제의 집은 예전처럼 닫혀있지 않고 창문이 열려있다. 동네 아이들은 조제와 대화를 한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제 조제에게 그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아주 평범한 어느 하루일 뿐이다.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곳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래도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관객에게 조제가 마주해야 하는 처절한 현실에 대해 말한다. 왜 조제가 제일 무서운 것으로 호랑이를 꼽았는지, 그리고 조제의 할머니가 경계한 것들이 무엇인지 영화는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연극의 1부와 2부 같은 느낌은 순식간에 두 인물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둘 중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모든 일들은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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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츠네오의 부모님 집으로 떠나는 여행은 잠시나마 두 사람의 행복한 한 때를 보여준다. 전복돼 있는 이별은 섣불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잘못된 일도, 잘못한 일도 아니기에 여행이 슬플 이유는 없다. 결국 이별은 자연스러운 헤어짐이다.
 
-형.
-응?
-지쳤어?

츠네오에게 츠네오의 동생이 묻는다. 츠네오는 잠식당한 감정을 안다. 츠네오와 조제에게 ‘앞으로’란 존재하지 않는다. 둘은 원래의 목적지가 아닌 바다로 향한다. 바다로 향하는 둘의 표정은 아까와는 다르다. 웃고 즐기며 대화한다. 어쩌면 둘의 마지막임을 둘은 서로 이야기 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가 옛날에 내가 살던 곳이야. 깊고 깊은 바닷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눈을 감은 츠네오가 깜깜하다고 하자 조제는 말한다. 바로 그곳이, 자신이 옛날에 살던 곳이라고. 그리고 그곳을 헤엄쳐 나왔다고 말이다.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
 
 떠나지 못하는 츠네오에게 건네는 조제의 위로는 천천히 츠네오의 몸을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조제가 인어공주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방으로 갈 때 ‘다이빙’하는 모습이나, 단순히 신체가 자유롭지 않은 활동 탓이었다. 그러나 반복해서 영화를 볼수록 느낀 것은 인어공주의 역은 어쩌면 조제가 아닌 츠네오였다는 점이다. 마침내 왕자의 사랑으로 자유로워진 인어공주처럼 츠네오역시 조제의 말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관계에 묶여있던 것은 조제가 아니었다. 묶여있던 것은 츠네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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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실은 단 하나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여자가 있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헤어진 두 사람은 각자의 몫을 살아간다. 더 이상 방치된 유모차에 서운할 일도,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조제를 안아야 할 일도 없다. 이별은 천천히 둘을 지난다. 특별한 사랑이 아닌 그저 평범한 어느 날의 사랑은 이렇게 끝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대체로 두 가지다. “특별한” 사랑이나 인물에 대한 탐구와 “그럼에도 평범한” 사랑이라는 이야기. 오늘 이 영화를 보면서는 후자의 시선으로 보고자 했다. 내게 와 닿은 것은 그들의 감정이었고 그게 다였다. 아마 멜랑콜리한 기분이 들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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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생각한다. 지금쯤 조제의 앞에는……누가 있을까? 츠네오 같은 애인이 있을 수도, 동네 꼬마아이들이 있을 수도, 어쩌면 아무도 없을 수 있다. 어느 평범한 하루를 앞에 둔 조제를 상상한다. 장을 보고 밥을 만들어 먹고 밤이 되면 읽던 책을 덮고 눈을 감는 일상. 그 지루한 일상에 조제는 무료함을 이야기 할까, 아님 그저 덤덤히 하루를 지나갈까? 조제의 얼굴을 떠올리지만 쉽사리 예상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꾸만 눈을 감고 떠올린다. 아침이 되면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켤 조제를. 지루하고, 평범한 하루를 맞이할 조제의 시작을.
 
 어느 하루, 조제의 앞에는…….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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