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 [시각예술]
-클림트 인사이드 전을 다녀왔다
글 입력 2017.03.21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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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디어아트전인 줄은 가서 알았다. 왠지 모를 배신감에 휩싸여 팔짱을 끼고 감상을 시작했다. 그 중 나의 시선을 강력하게 잡았던 건 작품 순서 중간 즈음에 나오는 여인들의 초상화였다. 비록 실제 작품은 아니어서 살짝 아쉬웠지만 그 인상만큼은 강렬했다. 실제로 1915년, 프리데리케 마리아 베어가 클림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며 한 말이 참 인상적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훌륭한 화가가 이미 초상화를 그렸을 텐데요.”
“예, 그래요. 하지만 당신을 통해영원한 존재로 남고 싶습니다.”예술을 통해 영원함을 부여받고 싶었던 사람들, 과연 예술은 영원할까,
영원이라는 것이 단지 시간에 관한 것이라면 그 대답은 그렇다가 되겠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작품 속에서 살아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림과 별개로 그들 각자는 늙고 병들 것이다. 그럼에도 액자 속에서만이라도 영원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작업을 지금 시대에선 사진으로, 영상으로 해오고 있지 않나 싶다. ‘남는 건 사진’ 이라며 놀러가서도 사진을 거의 100장은 찍어오는 요즘(의 내)모습을 보면 말이다.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아마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키스> 였다. 그래서인지 맨 마지막에 배치가 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실제로 오스트리아 빈의 한 궁전에 있고 우리나라에는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다고 한다.(그런데도 이토록 익숙할 수가 있다니!) 원래도 금색으로 뒤덮인 작품이 미디어를 통해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남과여 둘 사이의 우주를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들은 정말 그 키스를 하고 있는 순간 만큼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버지가 금세공사 였다는 말을 듣고 그가 금색에 이렇게 능한 것에 수긍이 갔다.생각보다 전시는 짧은 편이었다. 그러나 클림트 작품을 활용한 미디어 작품들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작품 <키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한 작품은 거울들 가운데 현란한 빛들이 쏟아졌다. 거의 모두의 포토존 같은 느낌이었다. 더불어 꼭 오스트리아 빈에 가서 실사를 보겠다는 마음까지 단단히 다지게 된 전시회였다.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미술 작품으로 이러한 시도들을 하는 게 마냥 신나지 만은 않다.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는 걸 수도, 정통만을 고집하는 고지식함 일 수도 있겠으나 작품은 작품으로 감상할 때 그 의미가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움직이고 색감이 터져 나오는 것, 물론 흥미롭다. 볼 때도 참 색감들이 예쁘다고 느끼면서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흔히 영상과 글을 많이 비교한다. 영상만 본 세대들은 글을 읽은 세대를 결코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다. 글이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일 거다. 이런 맥락에서, 이러한 미디어전의 취지는 참 좋지만 우리의 감상을 적셔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실제 작품이 주는 감동과 상상력을 주기는 많이 모자라 보인다.
그럼에도 좋았던 것은 구스타프 클림프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평생 여성들을 그리며 (여성의 몸을 그린 작품이 유독 많다.) 살았지만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은, 그러나 그의 작업실에는 늘 모델들이 있었고 그가 죽은 뒤에는 친자 확인 소송이 이어졌던 그런 삶을 살았다. 그는 “젊은 화가들은 더 이상 나를 이해하려 들지 않아. 그게 예술가의 운명인지도 모르지.” 라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은 구태여 머리로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는 듯하다. 언젠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그의 작품을 보는 날을 기대한다.[이정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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