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스푼의 시간, 감정의 시작 [문학]

감정, 기억 그리고 사람, 로봇
글 입력 2017.03.14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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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아내와 사별한 명정은 조금은 낡고 조금은 가난한 동네에서 혼자 세탁소를 꾸려가고 있다. 외국에 살고 있는 외아들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어느 날, 발신자가 아들인 택배 상자가 명정에게 도착한다.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본 명정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17세 정도 되는 소년의 모습을 한 ‘로봇’이다. 명정은 아들이 마지막으로 남겨준 선물인 듯한 이 로봇에게 언젠가 둘째 아이가 생기면 부르고 싶었던 이름 ‘은결’을 붙여주고 함께 생활한다. 

외부의 모든 자극을 데이터베이스화하며 때로는 스스로 판단하여 움직이는 인간형 로봇이자 가사노동과 간단한 업무 외에는 창의적으로 쓸 만한 구석이 없는 불완전 샘플인 은결은, 명정의 곁에서 세탁소 일을 돕는 한편 이웃 아이들 시호, 준교, 세주 등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은결이 도착하고 9년의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어느덧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고 명정은 자신의 생을 서서히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은결은 만들어진 대로 충실하게 자극과 정보를 받아들이고 학습한 내용을 고도의 연산 작용을 통해 메모리에 저장하고 데이터에 따라 반응한다. 하지만 복잡하고 정교한 계산으로도 답을 얻기 어려운 변수들이 불쑥불쑥 등장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렇게 인공두뇌의 가열한 연산으로는 계산해내고 실행할 수 없을 행동과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던 은결은, 그것이 설사 불완전 샘플이기에 나타나는 전산상 오류일망정 한 점 얼룩을 마음속에 품은 아이들과 명정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위로를 건네는 존재가 되어 가는데…….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감정, 시스템의 오류를 만든다


 은결에게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여러 부분이 나온다. 가장 인상 깊던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자신의 모습을 공포스럽다고 표현하는 장면. 또 하나는 주 감정으로 진행되던 시호에 대한 사랑. 책을 읽다보면 이게 사랑인지 호기심인지 헷갈리기도 할 정도로 보일 듯 말 듯 그 마음이 전해진다. 구병모 작가는 격하게 표출되는 가장 결정적인 감정은 사랑이라 생각했고, 이를 일부러 보일락 말락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원이 들어오고 깨어난 뒤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기는 처음인 것이다. 집에 유일한 거울은 욕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는데, 주인은 정도 이상으로 물이 튈까 염려하여 욕실청소만은 하지 말 것을 지시했었고 은결은 그 말을 충실히 따랐다. 욕실 문이 열려 있어도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메모리에서 불러낸 화상이 아닌, 태어나 처음 들여다보는 자신의 모습은.....
신기하다
공포스럽다

( 한 스푼의 시간 80pg )


 흔히 로봇을 떠올리면 감정은 찾아볼 수 없는 회색빛의 딱딱한 메탈 소재로 만들어진 기계가 연상된다. 가진 데이터를 기초로 대답하고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부자연스러운 인공지능 로봇들. 하지만 책 속의 주인공 은결은 반복적이고 명령에 충실한 모습이 아닌 스스로 무언가 해나가는 모습을 계속적으로 보여준다.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행동이 아닌 것이 인상깊다. 감정과 기억은 같은 것일까? 슬프고 좋아하고 화나고 속상한 이 감정들은 기억이 베이스가 되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마치 은결은 ‘그런 것으로 유추됩니다”라고 답하는 것만 같다.





깨다
깨다
꿈에서 깨다. 꿈을 깨다
꿈의 깸. 꿈의 깨어짐.
깨어나거나 깨어질 것을 전제로 하는 인간의 꿈은 어느 쪽 의미여도 그녀에게 무관한 것이다.

( 한 스푼의 시간 174pg )


-언어, 오해의 도구 혹은 이해의 도구


구병모 작가는 ‘언어라고 해서 인간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이해시키는 도구는 아니다. 오히려 오해의 도구가 되지 않나. 그렇다면 인간의 감정을 철저하게 오해하는 것이 어쩌면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한 매체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흔히 쓰는 번역기도 문장의 완벽한 뜻을 이해하지 못해 전혀 다른 문장으로 번역하곤 한다. 로봇이라도 사람들이 말하는 구어체의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은 힘들다. 그래서 은결은 계속 듣고 이해하고 오해하고 다시 알아간다. 그렇게 반복되어 말 뒤에 숨은 뜻까지 이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오해할까. 슬픔에 휩싸여 울컥하는 마음 때문에 내 생각을 전달하지 못한 적이 있지 않은가. 혹은 화나는 마음 때문에 하고 싶었던 말을 뒤로 미뤘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침묵이 또 다른 오해를 낳았던 적이 없는가. 필자는 이런 경험을 보았을 때 말은 감정을 전달하나 감정은 말을 방해한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말과 감정을 계속 경계해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사람들의 이야기


 이 책의 가장 큰 메리트는 로봇이 들려주는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은결이를 필두로 이야기는 진행되지만 은결이의 시야로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담담하고 조용하게 마치 내 옆집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처럼 들려준다. 은결이, 로봇의 시각으로 전해주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깊이 동요하지도 섣불리 이해하려하지도 않는다. 그저 지켜보고 어떤 감정일지 예측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다가온다. 마치 내가 옆에서 보고 듣는 듯 했다. 섣부른 공감과 이해가 없어서 더 담백하고 울림이 있게 다가온다. 작은 동네 세탁소에 일하는 로봇이 들려주는 동네 아이들의 성장과 각자의 아픔과 짐들이 멀지만 가깝게 다가온다.



도가니, 아가미에 이어서 최근에 나온 한 스푼의 시간까지, 구병모 작가의 소설은 현실세계와 먼 듯 하면서도 참 가까이의 이야기를 전해온다. 새로운 장치들은 신선하고 소설의 바탕이 되는 이야기는 울림이 있다. 구병모 작가의 가장 큰 강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람, 그리고 감정. 우리는 어떤 감정의 어떤 기억이 있나. 우리에게 한 스푼의 시간은 언제일까.


[김정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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