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후 시기 진정한 아메리칸 아이돌,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문화 전반]

음악에서만큼은 외길인생을 살아간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
글 입력 2017.03.14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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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시즌엔 재즈를 들어야한다는 작은 강박이 있다. 재즈의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화려한 느낌이 크리스마스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일까. 어김없이 찾아오는 12월, 포근히 내리는 흰 눈과 도시의 반짝이는 불빛이 섞인 풍경에 재즈 캐롤이 얹히면 그것만큼 설레는 일이 없을 것 같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재즈 캐롤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노래로 풀어낸 듯 하다. 중후하고 따뜻한 목소리, 화려한 멜로디와 리듬을 갖고 노는 듯한 그의 노래를 들을때면 크리스마스의 설레고 풍요로운 분위기를 언제든지 즐길 수 있었다. 너무 크리스마스와 잘 어울려서 그런지 시나트라를 아예 '재즈 캐롤 아티스트'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였는데, 사실 그는 한 때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소위 '아메리칸 아이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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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Sinatra's mugshot (1938)


  1940년대 시나트라가 솔로로 대중 앞에 나선지 얼마 안 되어, 그를 쫓아다니는 10대 여자아이들이 생겨났고 심지어 이 소녀팬들은 공연장에서 실신하기까지 했다. 기성세대, 중산층의 감성을 담은 '스탠다드 팝' 음악을 하는 그가 어린 세대에게 사랑받은 것은 조금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수려한 외모에 뛰어난 실력은 그 당시에도 인기 아이돌의 충분조건이었나보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인기에 비례해 헐뜯는 소문들도 거리에 나돌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출신인 시나트라를 경계한 반(反)이탈리아 세력이 그가 마피아 보스와 연루되어있다는 추측을 내놓았다. 이러한 스캔들에 더해 빡빡한 스케줄로 그의 성대 컨디션은 점점 나빠지고, 여러 계약들이 파기되었다. 시나트라의 전성기는 이때 끝난 것처럼 보인다.

  1950년대 이후 시나트라가 대중음악계에서의 입지를 견고히 하지 못한 까닭은 아마도 '저항'을 기조로 내세운 로큰롤 음악의 등장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로큰롤 스타하면 떠오르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음악 시장을 거의 지배하고 있었다. 시나트라의 음반 판매량은 엘비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단순히 이러한 인기의 양적인 측면에서 시나트라가 엘비스를 시기했을 수도 있지만, 시나트라는 근본적으로 젊음과 저항의 상징인 로큰롤을 싫어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로큰롤 스타들을 "더러운 노랫말로 10들을 유혹하는 백치의 깡패들"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그가 구사하는 장르인 '스탠다드 팝'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래에 있어서만큼은 그는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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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영원으로(1953)>


  암흑기를 거치다가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에 출연해 시나트라는 재기에 성공한다. 여러 불행한 사건들을 거쳐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에는 삶의 무게감이 담겼고, 이후 발표한 노래에서 시나트라의 중후한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기성세대에서 가장 유명한 그의 노래인 는 샹송인 원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인데, 정작 시나트라 자신은 가사가 자신의 삶을 얘기한다고 생각지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래를 듣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My way'가 시나트라 본인의 인생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And now the end is near
자 이제 마지막이 가까워졌군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내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네
My friend, I'll say it clear 
내 친구여, 나는 분명히 해둘 게 있다네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내가 확신하는 바대로 살았던 삶의 방식은
I've lived a life that's full 
나는 충만한 삶을 살았다네 
I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나는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더 굉장한 것은 이것보다 더 많이 난 내 방식대로 살았어 
Regrets, I've had a few 
후회? 몇 번 해봤지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하지만 별로 거론할 만큼 많았던 건 아냐
I did what I had to do 
난 내가 해야 할 것을 했고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ption 
한치의 예외 없이 난 끝까지 해냈지
I planned each chartered course Each careful step along the byway 
샛길을 따라 조심스러운 걸음도 계획했었어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하지만 그보다, 난 내 방식대로 더 많은 걸 하며 살았다는거야



  198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만든 공연장의 개막식에 거액의 공연료를 받고 출연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시나트라는 거센 비난을 받는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인종차별적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에 그의 공연이 대한 체제 유지로서 기능한 것은 아니냐라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삶을 면밀히 보면 얼핏 기회주의자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음악에서만큼은 깊은 애정을 담고, 자신의 기준을 지켰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참조
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jazz/jazz-08042011141748.html
http://www.izm.co.kr/artistinfoRead.asp?artistidx=1607

[최예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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