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야기의 위력은 어디까지인가 - ‘더 폴(The Fall)’ [시각예술]

글 입력 2017.03.1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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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가진 남자는 죽고 싶었다. 그는 스스로 생명을 끊을 능력조차 없기에, 아이의 손을 빌리기로 한다. 약 이름을 알려주고 몰래 약을 가져오게 시킨다. 아이는 대가를 요구한다. 놀아줄 것을. 남자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을 죽여줄 약을 얻기 위해 남자는 동화를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과 목적은 명확했다. 그는 아이가 만족할 만한 동화를 이야기한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마침내 자신이 택한 최후의 날이 왔지만 그는 죽는데 실패한다. 죽지도 못하는 자신의 몸을 인식했을 때, 그는 분노한다. 망가진 몸, 망가진 삶, 망가진 자살. 분노하는 그를 보며 아이는 약을 갖다 주면 그가 좋아할 거라 생각한다. 약을 훔치다가 아이는 사고를 당한다. 자신의 거짓말로 다친 아이를 보며 그는 눈물을 흘린다. 눈을 뜬 아이가 요구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동화의 결말. 슬픔과 분노로 얼룩진 동화의 창작자는 등장인물을 죽여 나간다. 한 명 씩 죽을 때마다 아이는 눈물 흘린다. 남자를 말린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자신이 투영된 이야기의 주인공 뿐. 제발 그를 살리라는 아이의 눈물은 주인공을 살린다. 이야기의 주인공도, 영화의 주인공인 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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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셈 싱 감독의 영화 ‘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2006년 개봉된 영화다. 지금도 찾아보면 좋은 리뷰가 넘쳐나는 명작이기도 하다. ‘더 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크게 영상미와 스토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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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폴’은 원작인 불가리아 영화 ‘요호호’의 판권을 구입하는 데 15년, 스코틀랜드,파리,인도,나미비아,중국,이탈리아,체코 등 28개국에 달하는 장소 섭외에 17년, 주인공 선정에 7년, 제작 기간은 4년 반이 소요됐다. 감독의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은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황홀했다. 이야기를 쫓는 아이의 상상은 영상이 되어 나타난다. 동화의 장면에서 코끼리가 바다를 헤엄치고, 나무가 스스로 불타고, 사막위의 하얀 천이 새빨갛게 물들어간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저런 영상을 CG를 쓰지 않고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더 폴’을 ‘캔버스를 욕망하는 스크린, 붓을 동경하는 카메라’라고 평했고, 김봉석 평론가는 ‘영상만으로도 볼 가치는 충분하다’라고 평했다. 내가 이 영화와 관련해 아쉬워하는 단 한 가지는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 폴’을 그저 눈이 즐거운 영화라고만 얘기하기엔 부족하다. 혹자는 주인공인 ‘로이’가 이야기하는 동화가 내용이 바뀌고, 허무맹랑하다는 점을 들어 영상에 비해 스토리가 약하다고 얘기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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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인 ‘로이’와 그의 이야기를 듣는 ‘알렉산드리아’는 화자와 청자의 입장이다. 스토리 요약에서 언급했듯, 청자와 목적이 분명한 상황에서 ‘로이’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청자의 요구를 적극 수용했다. 이야기는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말은 바꿀 수 있고,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스토리텔러인 ‘로이’와 청자였던 ‘리아’는 어느새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간다. ‘더 폴’에 등장하는 내부이야기는 이야기의 내용보다 ‘스토리텔링’이라는 발화방식을 영화에서 영상으로 구현해냈다는 점과 그 기능에 중요도를 두어야 한다.

 절망적 상황의 화자가 진행하는 이야기는 필연 절망적인 이야기로 흘러간다. 왜 주인공들을 죽이냐는 ‘리아’의 질문에 ‘로이’는 대답한다. 내 이야기니까(It's my story) 내 이야기도 돼요(Mine, too)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두 사람은 진정 ‘소통’하고 있었다. ‘로이’는 죽기 위해 만든 이야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희망을 얻게 된다. 자신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던 주인공을 살리고, 동화에서의 목표를 이룬다. 영화의 결말, 상처가 나은 ‘리아’는 오렌지 농장으로 돌아간다. ‘리아’의 말에 의하면 ‘로이’는 ‘다른 배우들은 하지 못하는 걸 한다’ 본래의 직업이었던 스턴트맨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나는 ‘힐링’ 담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 사회의 ‘힐링’은 따뜻한 영화, 따뜻한 음악, 따뜻한 글귀나 그림을 보며 얻는 잠깐의 위로에 그치는 것 같다. 위로는 힘이 될 수는 있으나, 해결을 주지는 못한다.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를 회피할 것이 아니라 문제를 마주해야 한다. ‘더 폴’의 주인공 ‘로이’는 사고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되고 여자 친구마저 불구가 된 자신을 버린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그는 죽기 위해 아이를 꾀어 약을 가져오게 한다. 죽기위해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아이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소통에 성공한 ‘로이’는 자신을 죽이는데 힘을 보탤 ‘리아’를 통해 치유를 얻는다. 다시 삶에 대한 용기를 얻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나 역시 이런 사람을 얻을 수 있기를, 나 또한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김마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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