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물고기로 살 것인가, 가시로 살 것인가

글 입력 2017.02.2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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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남건우


물고기는 제 몸속의 자디잔 가시를 다소곳이 숨기고
오늘도 물 속을 우아하게 유영한다
제 살 속에서 한 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짐짓 무시하고
물고기는 오늘도 물 속에서 평안하다
이윽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사납게 퍼덕이며
곤곤한 물과 바람의 길을 거쳐 식탁 위에 버려질 때
가시는 비로소 물고기의 온몸을 산산이 찢어 헤치고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자신을 드러낸다   





 남건우의 시 <가시>에서 삶은 고통의 시간이다. 물고기는 자신에게 전부인 바다에서 살아가기 위해 가시를 품어야 한다. 또한 거기에 얄궂게 나마 붙어있는 살점을 지켜내야 한다. 그것이 물고기를 사정없이 찔러 대도 물고기는 그것을 팽하고 내치지도, 꽉 부둥켜 안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헤엄친다. 그 어정쩡함, 그 괴로움을 뻔뻔스럽게 모른 체 하며.
 죽음에 이르러서야 물고기는 가시를 시원스럽게 세상 밖으로 펼쳐낸다. 시인은 더 나아가 가시가 스스로를 당당하게 드러낸다고 이야기한다. 그동안 동고동락했던 살점들을 가차없이 풀어헤치면서. 매끈한 비늘, 그 위에 수놓아진 화려한 무늬, 힘차게 물살을 가르던 지느러미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사납게 뻗은 나뭇가지처럼 볼품없게 늘어 졌지만 제 몸 어떤 것보다도 단단한 가시만으로 물고기는 스스로가 물고기라는 것을 증명한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가식으로부터의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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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기고 감추는 데 익숙하다.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우울함, 슬픔, 괴로움 따위를 빠르게 뭉쳐 침전물로 가라앉히고 아무 일 없는 듯 고요해지는 일은 의식하기 전부터 자연스럽게 해오던 것이었다. 내 생각을 드러내기 보다는 타인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 역시 그렇다. 그게 옳다고,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 은연 중에 되뇌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대학에서 S와 Y를 만나고 나서 였다.
 S는 솔직함을 인간관계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자신이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에도,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에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려 하지 않는다. 그와 달리 Y는 아주 가까운 사람, 가족이나 연인을 제외하고는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를 바란다. 또한 그렇게 상대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S는 온전히 가시를 드러내고 그것을 자연스레 여기는 쪽이라면 Y는 철저히 물고기의 형상으로 물 속을 헤엄치는 걸 선호한다. 끝과 끝에 서 있는 이 둘은 그 중간쯤 어딘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나를 이쪽저쪽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겨 가시에 박힌 채 몸부림치게 만들었다.

 내게 가시의 존재를 인정하는 건 더욱 단단하고 매끈한 물고기가 되는 것보다 백 배는 어려운 일이다. 가시에 찔리는 아픔 보다도 가시를 숨김으로써 물 속을 아무 탈 없이 떠다닐 수 있다는 안도감이 훨씬 지배적이다. 그런 답답함과 불편함이 벼슬인 냥, 숨쉬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인 냥 살아가는 일에 나는 최면에 걸린 듯, 술에 취한 듯, 그렇게 몽롱하게 익숙하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우연인 척 누군가에게 가시를 들키고 싶기도 하다. 스스로 드러내는 데 서투르기에, 슬쩍 가시의 뾰족한 끝을 내보이기도 부끄럽기에, 가끔가다 마주치는 우연에 기대어 은근히 막힌 숨을 토해내곤 한다.
 애초에 가시는 숨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둘러싼 살점이 말끔히 사라진 뒤에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에 막연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가시는 접시 위에서 생을 마감한 여느 물고기의 가시가 그러하듯 축축하고 기분 나쁜 치부이자 진실, 거짓이자 본연의 ‘나’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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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는 물고기로 살아가는 일과 가시로 살아가는 일 두 가지를 구분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종래엔 물고기와 가시로 동시에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모순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에 압도되어 살점을 억지로 벗겨내려는 이들에게, 혹은 더욱 처절하게 물고기가 되려는 이들에게 한편 위로가 되어 주기도 한다. 가시가 아름답든 볼품없든, 그것을 숨기는 답답함에 빠지든 그 답답함에 숨이 막혀 차라리 천둥 벌거숭이가 되고 싶어 하든, 가시가 그 무엇보다도 오래 살아남는다는 건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저승의 문턱을 넘는 건 나의 육체이지, 나의 본질은 아니다. 나의 본질은 나의 글로, 노래로, 사진으로, 그림으로, 누군가의 기억으로, 사랑으로, 원망으로 남아 공허하게 세상을 떠돈다. 그런 가시가 이왕이면 ‘눈부신 빛 아래 선연하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어차피 죽으면 보지 못하니 살아있는 동안에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축복이 아니겠는가 하고. 모순으로 덩어리진 생채기를 안고 바닷속을 느긋하게 헤매는 물고기들의 피를 넌지시 닦아주는 시,<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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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암보암?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감정과 느낌의 응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예술로부터
감정과 느낌이 가진 모습들을 평범하게, 동시에 독특하게 풀어내어
보암보암이란 이름처럼 따듯하고 몽글몽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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