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소나기마차가 '소나기 마차'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글 입력 2017.02.2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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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소나기마차가
소나기 마차가 
되지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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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인간은 이야기 하는 존재라고 불릴 정도로 인간은 이야기를 사랑해왔죠. 저는 그 중에서도 특히나 더 이야기를 사랑하는 인간입니다. 이야기 그 자체는 물론, 전달하는 방식,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 이야기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 등. 이야기의 모든 것을 사랑하죠. 그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는 그 아이러니 속에서 수많은 의미들을 창출해 내니 말입니다. 제가 연극에선 극중극 형식에 매료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리뷰를 쓰며 ‘소나기 마차’에 꽤 많은 기대를 갖게 됐습니다. 이야기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의 역할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라니. 게다가 극중극 형식을 취하고 있다니.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연극을 보며 무언가 깨닫고 깨우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깨우침은 ‘연극 소개’에서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니, 연극 소개를 보지 않았다면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았습니다.


'소나기 이야기'에서 문제였던건 '소나기'가 아닌 '이야기'

연극 소개에서 이들을 통해서 ‘고통스럽더라도 이야기 해야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고 했을 때, 또 ‘이야기꾼 들이 두려움에 잠식됐을 때 이야기는 좁아지고 비틀려지’며 ‘퍼그가 죽음의 두려움에 빠져 파멸하고 만다’는 설명을 봤을 때. 저는 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두려운 진실’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외면 받는 이유 또한 ‘두려운 진실’이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관심을 받기 위해 ‘쇼’를 벌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쇼’를 벌였다는 것이 이들을 파멸로 이끌고 갔구요.

소나기 마차는 ‘소나기 이야기’를 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소나기가 세상을 멸망시켜가는 이때, 소나기를 물리칠 유일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들고 온 이들이죠. 처음 연극이 시작됐을 땐 두근두근 거렸습니다. 어두운 무대, 무대에 놓인 6대의 자전거. 기괴한 우비를 쓰고 미친 듯이 달리는 사람들. 무언가에 홀린 듯 페달을 밟으며 파괴적으로 웃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신선했으니까요.

‘세상이 멸망해 갈 때’라는 세기말 감성을 잘 소화해냄은 물론, 그 멸망의 시대에서 유랑하는 이들을 잘 표현해낸 것 같아 설렜습니다. 마차를 자전거로 표현한 것 또한 그들이 열심히 마차를 달리고 있으며 절박하다는 것이 너무나도 잘 표현해 좋았었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드디어 멈추고 공연을 시작하려 했을 때는 저 또한 ‘소나기 마차’의 관객이 된 양 기대가 됐었습니다.

하지만 마차가 멈추자마자 터져 나오는 ‘창녀’ 소리는 그러한 제 기대감을 반감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창녀’라는 말과, 그런 여성에 대한 짙은 멸시는 불쾌감을 불러일으켰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세기말이라는 세계관 상, 별로 달갑진 않지만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 성적인 요소를 동원하는 것은 있을 수 있으며, 지금도 멸시받는 단어이니 다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그 시대 속에서는 더더욱 그 멸시가 강화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루비와 애꾸, 제인과 멸치의 성관계가 무대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됐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 또한 그럴 수 있다며 찌푸려지는 눈살을 다시 피고자 노력했습니다. 퍼그의 채찍질 등의 폭력성도 불편했지만, 세기말이니 그럴 수 있다고. 계속해서 합리화 시켰습니다.

하지만 소나기 마차가 극을 시작했을 때, 의문은 배가 됐습니다. 소나기 마차의 연극은 저급하기 짝이 없는 성적 묘사의 향연이었습니다. ‘소나기마차’는 ‘모두가 두려워 입을 닫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은 ‘두려운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소나기 마차를 외면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극중극을 보니 사람들이 소나기 마차를 외면하는 이유가 그들이 ‘소나기 이야기를 해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극이 진행될수록 더더욱 심화됐습니다. 심지어 두 번째로 찾아간 마을에선 축제를 열 정도로 환대받았고, 극 또한 성공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을은 결국 녹아내렸죠. 물론 그 마을 사람들이 좋아한 것이 ‘이야기’가 아닌 ‘제인의 몸’이나 ‘예언’이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극이 인기가 없는 이유가 ‘소나기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라면, 어떤 것이 있더라도 결국 극을 했을 때는 환대를 받지 못했어야 했는데. 그 마을에서 만큼은 이들의 이야기는 주목받았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소나기 마차의 극을 보지 않는 이유는 단지 ‘소나기 이야기’를 해서는 아닌 거죠.

이는 마을을 옮겨갈수록 더더욱 극명해 집니다. 어떤 마을에선 무대에 오르자마자 쫓겨나기도 하는데 그 이유가 ‘소나기 이야기를 해서’는 아닙니다. 이들이 ‘두려운 것’에 대해서, 혹은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맞을지 모르나.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이 ‘두려움이나 진실에 대한’, 즉 ‘소나기’이야기를 해서가 아닌 듯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했을 때, 극 전체의 내용은 미궁으로 빠졌습니다. 

사람들이 소나기에 녹아내린 이유는 ‘소나기에 대한 이야기를 외면해서’가 아니며, 퍼그네 사람들이 살아남은 이유 또한 ‘소나기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게 되니 말입니다. 파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돈’을 벌기 위해 ‘쇼’를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소나기’가 아닌 ‘쇼’를 한다는 것은, ‘소나기 이야기’로는 관심을 끌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했을 때. 그들이 쇼를 하는 것은 단순히 ‘퍼그의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으로 느껴졌습니다. 소나기 이야기를 잘 한다면 관심을 끌고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퍼그는 그 실력이 안 되기 때문에 쇼라도 해야 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남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했기에 돈을 못 벌었고, 그들 또한 두려움에 잠식돼 ‘소나기 이야기’를 포기했다기 보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지 못했기에 돈을 벌지 못했고 퍼그의 이야기로는 돈을 벌지 못하니까 ‘쇼’를 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파국의 원인이 ‘두려움에 잠식 돼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소나기란 소재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 되는 거죠. 결국. ‘소나기 이야기’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소나기 마차’는 극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할 수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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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를 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파국이 예정됐기 때문

소나기 이야기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 그들이 ‘쇼’를 한 것에 대한 정당성 또한 획득하지 못하게 했다면. 소나기마차 단원들의 관계성은 소나기마차의 ‘파국’의 정당성 또한 획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연극은 퍼그와 단원들이 두려움에 빠져, 진실을 외면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쇼’를 해서 파국을 맞았다고 말을 하는데요. 저는 과연 ‘파국’이 ‘소나기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시종 폭력적인 태도에다가 책임전가적인 발언만 해왔던 퍼그라던가. 그걸 증오하면서도 그대로 배운 애꾸라던가, ‘창년’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며 열등감에 쩔어 있는 멸치라던가, 그와 계속해서 대립하는 다다, 권위적인 제인, 맨날 할머니만 찾는 기면증 루비. 이들의 관계성만으로도 이미 처음 시작부터 이들의 파멸은 예상 가능했으니 말입니다. 독선적이기 짝이 없는 리더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은 단원들의 구성은 절대 지속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진실 된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하더라도, 이들 사이의 불화는 그리고 파국은 이미 필연적이었습니다.

실제 ‘파국’도 그들이 소나기에 녹아내린 것이 아니라 불화로 서로를 살인한 것이었으니. 더더욱 그렇죠. 뿐 아니라 만약 ‘쇼’를 해서 그들이 파멸을 맞았다고 말을 하기엔,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이야기의 필요성’에 대해서. 아니 ‘이야기’에 대해서 집중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외려 쇼를 하자고 부추겼던 제인은 살아남았죠. 결국 그들의 파국 또한 ‘소나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쇼를 했기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연극이 서사의 정당성들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사람들이 소나기 이야기를 외면해서 쇼를 한 것도, 쇼를 해서 파국을 맞이한 것도 아니게 됐습니다. 그저 실력이 부족해서 돈을 벌지 못했고, 서로 원체부터 인간성이 별로였거나 관계가 별로였기에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 됐죠.


‘이야기의 역할’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인정받고 싶어서’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것은 퍼그라는 인물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퍼그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라고 말합니다. 소나기 이야기로 세상을 구하려 한다니, 낭만적이죠. 어떻게 보면 ‘구국의 영웅’적 면모를 가졌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퍼그가 ‘소나기 이야기’로 세상을 구하려는 이유는 정의감이나 영웅 심리라기 보단, 어머니에 대한 열망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때문인 듯 했습니다. 

퍼그가 ‘이야기’가 소나기를 이긴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어머니 덕분이었습니다. 소나기에 먹힌적이 있던 퍼그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덕분에 소나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그 사건 후 퍼그는 ‘어머니’의, 혹은 ‘어머니의 이야기’에 대해서 열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머니의 시체를 보관하고 있던 것만 해도 그와 같은 이유였을 것입니다.

 퍼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무한한 자신감을 가지며, 그 이야기가 소나기를 물리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단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탓이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책임을 단원들에게 전가하죠.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퍼그의 자부심은 엄청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도 듣지않을 때, 그를 견디지 못해 아이들을 몰살했을 정도로요. 이야기를 쓰고싶어하는 애꾸의 열정을 ‘넌 나한테 안된다’며 무참히 짓밟을 정도로요. 

결국 이와 같은 퍼그의 캐릭터를 봤을 때, 퍼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절대 ‘두렵더라도 이야기해야만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 또한 어머니 이야기처럼 소나기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자신의 이야기 또한 대단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서였죠. 퍼그는 절대  이야기에 대한 ‘사명감’으로 이야기를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퍼그가 굳이 사명감에 의해 이야기를 했을 필요는 없지만. 그런 퍼그의 캐릭터성 때문에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라는 말이 ‘이야기의 역할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혹은 ‘이야기가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아니면 다들 죽는다, 내 이야기만이 세상을 구한다’라는 헛된 자부심으로 들렸던 것은 아쉬웠습니다. 결국 퍼그라는 인물 또한 ‘왜 이야기가 필요한지’에 대한 것은 설명해주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결국 결말부. 모두 죽고 루비와 제인은 다시금 여정을 떠납니다. 루비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와는 다른, '소나기에 의해 사람들이 얼마나 죽고 다쳤는지. 얼마나 슬퍼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며 떠나죠. 결국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하지만 글쎄, 그 시대에서 그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결국 연극 소나기 마차는, 마치 극 중 소나기 마차처럼. 사람들의 공감과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야기의 역할에 대해서 말하고자 헀지만 결국 ’소나기마차‘라는 이야기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극 중 ’소나기 마차‘가 외면 받은 것은 ’불편한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관객들이 ’꼭 필요한 이야기‘를 외면할 정도로 미개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소나기 마차‘의 이야기가 재미 없었기 때문이었죠. 마찬가지로, 연극 소나기마차가 외면받은 것 또한 관객이 미개해서가 아닙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세계관은 좋았으나 여러 부분에서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해서였죠. 소나기마차처럼 ’쇼‘로 전락해버리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연극 소나기마차가, 극중 소나기마차가 되지 않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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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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