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흐를 위한 기록 : 기록1 [문화전반]

글 입력 2017.02.2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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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


 프랑스에 있는 C와의 연락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미술을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 C는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노라 말하며 안부를 물어왔다.

 -나야, 뭐. 프랑스는 어때?
 
 어쩌면 식상할만한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C는 오랜만에 생각이 나 연락했다며 참 반갑다 얘기했다. 나 역시 반가운 마음은 컸다. 근 5년이 되도록 서로의 연락을 몰랐던 친구였다. 내가 한창 미술을 전공하고 있을 땐 이미 유학을 준비하던 C였고, 수능을 앞으로 두었을 즈음엔 C는 이미 프랑스로 간 뒤였다. 그 후로는 나 역시 내 생활이 바빠 C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볼 틈이 없었다. 기억 속의 얼굴이 맞는다면, C는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은 친구였다. 산책을 좋아하고 화방에 다니며 그림을 그리던 자유로운 친구였다.

 -넌 요즘 뭐해?
 
 C의 물음에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뭘 하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냥 학교 다녀, 라고 말하기에는 대답이 너무 심심했다. 글을 쓴다고 하기엔 내 글에 자신이 없어서 섣불리 글을 쓴다 말할 수도 없었다.
 
 -공상하고, 망상하고, 상상해.
 
 내 대답에 C는 그럴 것 같았어, 라고 말했다.
 
 -그냥 뭐랄까. 넌 평범한 건 안 할 것 같았거든. 내 예상이 맞았네.
 
 C의 말에 더 이상의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멀리 있는 프랑스 친구에게 사실은 난 네가 예상치 못한 평범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노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C는 종종 이렇게 연락하자는 말을 남기곤 연락을 거뒀다. C의 얼굴은 그때와 다름없이 매력적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더 이상 그런 미소 따위 존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2. 나와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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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C가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교실에서였다. 나는 소위 말하는 일진들과 친구였고 C는 정반대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C와 내가 친해진 것은 다름 아닌 학원 때문이었다. 입시미술학원에 다니며 입시생들의 날카로운 기운과 함께할 무렵 C가 왔다. 나와 C는 서로 놀랐지만 인사는 하지 않았다. 유치하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바람 쐬러 갈래?
 
 먼저 말을 건 것은 C였다. 나는 멀뚱히 C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시를 준비하는 처절한 눈들이 나와 C를 바라봤다. 연필깍지에 껴진 뭉툭한 4B를 내려두고 C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림 그리는 줄 몰랐어.
 
 이른 여름바람이 조금은 덥게 불었다. C의 말에 왜? 라고 되물었다.
 
 -그냥. 그림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
 
 어쩌면 C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당시 내가 몰려다니던 무리는 오직 친구와 비행에만 관심을 두던 무리였다. 그러니 관찰자 입장인 C의 시선에선 내가 미술을 한다는 것에 놀랐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 아빠가 그림 잘 그려. 그래서 온 거야.
 
 내 대답은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투박한 손과는 다르게 그림을 무척이나 잘 그리는 분이었다. 디자인이나 서양화, 캘리그라피까지. 아버지는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 있어 하셨다. 미술학원을 다니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버지를 닮았으면 손재주가 좋을 테니, 한번 다녀보자 라는 마음이었다. C는 고개를 끄덕이곤 올라가자 말했다. 나와 C는 그날을 기점으로 비밀친구가 됐다. 웃기지만 학교에서는 모른 척하면서 학원에서는 이것저것 떠들고 그러다 혼나기도 하는 친구 사이가 된 것이다.
 
 C가 학교를 그만 둔 것은 열다섯 살의 봄이었다. 필수교육이기 때문에 자퇴가 안 되자 C는 학교를 빠지기로 하고 출석일수를 미달시켜 학교를 그만두었다. 나는 C가 왜 학교를 그만둔 것인지 알고 있었다. C는 학교에서 혼자였다. C와 어울리던 무리는 C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렇다고 우리 무리로 올 수는 없었다. 이미 카르텔이 형성된 무리는 흡사 정글과 같은 곳이었다. 나 역시 그 무리 안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연명하기 위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C가 학교를 그만두기 전 나는 학원을 그만두었다. 무리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 나는 다시 무리로 돌아가 밤늦게까지 놀고 학교에선 자는 생활을 반복했으며 때때로 비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내게 무서웠던 것은 어른들의 말이나 꾸중 같은 것이 아니라 무리로부터 도태되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었다. C는 학교를 그만 두었고 나는 C가 학교를 빠진 지 꼬박 한 달이 다 돼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죄책감은 나를 무리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다.

 

3.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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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가 학교에서 사라진 이후 나 역시 무리를 나왔다. 무리의 아이들은 다행히도 이탈한 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무리의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중이었을 테니. 그 즈음 나는 다른 친구들을 사귀고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반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아이들과 함께 피구를 했다. C의 흔적은 놀라울 만큼 존재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미술학교로 가기 위해 준비하면서 내 생활의 대부분은 그림을 그리는 일에 집중되었다. 학원은 다니지 않았지만 밤을 새워 그림을 그리고 벽면에 가득 일러스트나 좋아하는 그림들을 프린트해 붙였다. 마침내 미술학교에 합격하고 입학할 때까지도 나는 C를 떠올리지 않았다.
 
 전공을 결정하기 전까지는 서양화와 동양화, 조소와 디자인을 모두 배워야 했다. 학교의 커리큘럼은 자유를 표방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전 수업까지만 국어나 영어 같은 일반과목을 배우고 이후론 저녁 10까지 그림을 그려야 했다. 견딜 수가 없어서 그림을 그리다 말곤 울기도 했다. 모두의 이젤 위에 똑 같은 그림들이 가득했다. 그 모습은 일종의 공포로 다가왔다.

 서양화를 유독 좋아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 공포와 연관되어 있는 건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디자인이 자유롭다고 했지만 붓을 들고 물감을 찍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디자인만큼 답답한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디자인은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서양화는 물이 번지는 것 자체로 그림의 풍경을 완성했다. 아마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나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C와 연락이 닿은 것은 미술학교를 떠나 전학을 간 뒤였다. C는 유학 준비로 바쁘다고 했다.
 
 -어디로 가? 미국?
 
 C는 고개를 저었다. 프랑스. C의 얼굴이 보기 좋게 붉어져있었다. C는 그린 그림 몇 개를 정리해 포트폴리오로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넌 아직도 그림 그려?
 
 C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한테 A3종이는 너무 좁다.
 
 C가 웃었다. 나 역시 C를 따라 웃었다. 그 해 C는 프랑스의 미술학교로부터 미팅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C에게 작별을 고하며 잘 됐음 좋겠다는 진심을 말했다.
 
 아직까지도 난 C에게 꺼내지 못한 말이 있다. 내가 미술학교를 다니다 그만 둔 이유에는 비용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도 있지만 가장 큰 존재는 C라는 이유였다. 내게는 아직도 선명한 C의 그림과 얼굴이 붓을 꺾은 큰 이유였다. 고흐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외롭고 고독하지만 아름다운 그림과 붓을 움직이면서도 흔들리지 않던 C의 눈빛과 웃음. 나는 C의 모습을 보며 절망과 동시에 경외심을 느꼈다. 물감이 묻은 손가락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C의 모습을 본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창피하게도 길에서 울었다. C를 넘어설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은 확신이 되어 나를 구석으로 몰았다. 그 후 일반 인문계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게는 A3용지가 작았는데 A4크기도 되지 않는 작은 공책의 여백은 몹시도 컸다. 팔목이 저릴 정도로 글을 쓰고 나면 문득 C가 그리웠다. 만약 C가 나를 보았다면, C역시 내게서 절망감을 느낄까? 답지 않은 질투였다.
 
 C는 최종합격 통지를 받았고 나 역시 그 다음 해에 대학에 합격했다. C의 페이스 북에 올라오는 반가운 소식들을 보며 나는 C가 나아갈 미래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를 전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섣불리 연락을 하지 못한 것은 C의 열다섯 살에 남겨져 있을 외로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는 C의 앞날에 진심으로 축복을 빌며 컴퓨터를 껐다.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 대한 상념이 길었다.
 
 며칠 전 C와의 연락을 끝내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 고흐의 그림을 보았다. 찬란한 푸른 빛이 금방이라도 반짝일 것만 같았다. 언젠가 C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른이 되면 꼭 고흐의 그림을 직접 보고야 말겠노라고. 나는 아직 실제로 보지 못했지만 어쩌면 C는 보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C의 메시지에선 고흐의 광기 어린 냄새가 미미하게 풍겼다. 오늘 밤은 부디 별이 빛나는 밤이기를 바라본다.
 
 프랑스의 밤도 한국의 밤도, 모두 론의 강 위로 비치는 별들처럼 빛나길 기도하며 기록을 마친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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