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글 입력 2017.02.22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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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그렇게들 하잖아요.”
어쩌면 우리 사회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그러나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은 채 하는 말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안하고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지난해 발표된 OECD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7시간 41분. OECD 회원국 중 최하위라고 한다. 잠을 줄여 가면서까지 일해야만 하는 우리는 큰 성공이나 운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남들이 살아가는 대로만, 보통 사람만큼만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 2017년이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지금, 어김없이 올라오는 ‘현대인의 수면 부족’에 관한 기사는 내게 큰 물음표 하나를 던져 주었던 박혜수의 전시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말하는 ‘보통’과 ‘정상’을 쫓아 살아간다. 그 과정 중 소소한 일상은 보통이 되기 위해 혹은 보통보다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잊히고 버려져야 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보통의 기준, 그 기준에 맞춰 살아가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에게 박혜수는 그러한 기준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모두가 외치는 그 보통이 무엇이냐고, 애초부터 이러한 기준이 존재하기는 한 것이냐고.

지난 해 진행되었던 박혜수의 전시 'Now here is nowhere'은 ‘지금 여기는 아무데도 없다’는 의미를 담는다. 언뜻 모순된 것처럼 들리는 이 말은 보통을 추구하고, 정상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지만 전혀 정상적이거나 자연스럽지 못한 우리 삶의 모순을 짚어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서 보여주는 보통의 모습들, 보통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다. 현실과 규격화된 보통, 그리고 그 보통의 숨겨진 면을 차례로 전시를 전개하는 박혜수는 우리가 그렇게 따라가고자 했던 보통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현실-Bottom Life

박혜수, < World's Best >, 금속 구조물, 스테인레스 스틸, 깃발, 조명, 거울, 2016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정면에 보이는 것은 굉장히 크지만, 어딘가 흉물스럽고 차가운 느낌마저 남기는 철제 조형물이다. 마치 공사가 덜 끝난 공사 현장처럼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 거대한 조형물은 아이러니하게도 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조형물에 붙인 이 제목이 작품과 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를 고민하며 작품 앞에 선 후 비로소 이 작품이 4층까지 이어진 높은 조형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에펠탑과 비슷한 철제 탑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에펠탑이 가져다주는 감각적인 즐거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작품을 과연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의문을 가진 채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든 순간, 렌즈에 담긴 이 조형물의 모습은 오직 아랫부분뿐이다. 아무리 카메라를 올려 보아도, 아래에서 윗부분,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저 위의 정상까지의 모습은 담을 수가 없다. 그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이 딱 여기까지인 게 아닐까. 저 위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이 다 하니까, 보통 그렇게 올라가니까 나도 그래야지.

어렸을 때 읽었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 그려진 한 삽화가 겹쳐진다. 애벌레들이 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다른 애벌레를 누르고 애를 쓰던 모습이다. 애벌레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하나의 탑을 이루고 있던 그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작품도 마치 누구나 올라갈 수 있다는 듯이 사다리를 사방으로 펼치고 있지만, 정작 아래에선 위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한 층 더 올라가서 본 이 작품에는 거울이 달려 있다. 그리고 마침내 보이는 정상의 모습에는 하얀색 깃발이 양쪽으로 달려 있다. 거울로 나를 비춰보면서, 그리고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비춰보며 끊임없이 비교한 끝에 도달한 정상에는 하얀색 깃발뿐이다. 우리의 일상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을 누르며 도달한 노력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결과가 아닌가. 외롭게 꽂힌 흰 깃발은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지만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는 항복의 표시로 느껴진다. 원하는 기준에 도달해도,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또다시 아등바등하는 것이다. World’s best,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이 이 작품 하나로 다가온다. 모두가 보통을 쫓아 저 위로 올라가지만,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규격화된 보통-Average Life

보통이란 없다/우리가 온 세상을 다 알고 이해하고/보듬을 수 없듯이/타인의 삶에 비춘 나의 삶을 보통이라고/할 수 없다
-태이(Taey lohe), 「하루」 중에서

가변적 평균대.jpg
박혜수, <가변적 평균대>, 금속 구조물, 레이져 수평계, 2016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빨간색 빛이 수직과 수평으로 뻗어 있다. 바둑판무늬처럼 겹쳐진 빛들은 벽면에 투사되어서 여러 개의 접점을 만든다. 완벽하게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진 빛에서 만들어진 이 접점은 너무나 또렷하여, 마치 그것이 정답인 양 보인다. 완벽한 질서를 만들어내고,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옆으로 삐끗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평균대 위에 첫 발을 딛자 그 접점이 흔들리면서 소리가 난다. 접점은 나의 걸음에 따라 변화하고 다른 접점을 만들어낸다. 마치 정답처럼 보였던 완벽한 접점들은 나의 한발 한발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던 보통의 기준, 뛰어넘으려고 노력했던 그 보통 사람들의 평균은 애초에 우리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있을 거면서, 그 사실을 모르는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평균에 우리 자신을 맞추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태이는 타인의 삶에 비춘 나의 삶을 보통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보통 그렇게 하니까요”라는 말 속에 담겨진, 타인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내가 다른 길을 가면 보통이 아닌 이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은 타인의 삶이라는 작은 틀 속에 우리를 가둔 것이나 다름없다. 타인의 접점, 보통의 접점은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결코 정답은 아니다. 정답은 가변적인 것이다.

일그러진 보통의 풍경들

city poem.jpg
박혜수, < City Poem > 중 < 주머니 속, 사정들 >, 한국과 영국의 길에서 주운 개인물품, 사진, 모니터, 지도, 2016

흰색 벽면의 한 귀퉁이에는 다양한 사물들이 붙어 있다. 누군가의 일상의 한 부분이었던, 그러나 그 누군가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버려진 기억들이다. 이 기억들에는 누군가의 걱정거리도 담겨 있고, 미처 가져가지 못했던 물건들의 짝도, 어린아이의 작은 낙서도 남겨 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자그마한 일상의 조각조각들. 박혜수는 우리의 무의식으로 들어간, 혹은 우리가 무의식으로 넣으려 했던 이 일상들을 다시 펼쳐놓아 우리 앞에 보여준다.

 찢어진 종이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영어 단어들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작은 종이 한 장은 길을 가는 시간도 아까워 영어 단어를 외우던 나의 모습을 회상하게 한다. 보통의 기준을 따라가는 것, 그것은 결국 우리의 일상마저도 보통의 노예로 만들지 않았던가. 우리의 일상은 박혜수의 말처럼, 어쩌면 다가오는 내일을, 더 좋은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에 불과했음에도 모른다.

아마 전시되지 않았으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렸을 이 일상의 기억들은 우리에게 보통을 쫓느라,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가느라 희생되어 버린 하루하루를 돌아보게 한다. 별 볼일 없는 이 작은 사물들은, 보통에 이르기 위한 저마다의 노력을 통해, 보통의 기준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잠잠히 드러내고 있다.

정상은 잘 포장된 도로와 같다. 걷기엔 편할지 몰라도, 꽃은 자라지 않는다.
-빈센트 반 고흐

잘 포장된 도로를 가려고 애쓰는 우리들에게 박혜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아니 미처 생각지도 못한 채 그냥 따라가고만 있는 ‘보통’에 대해 말한다. ‘사실 보통이란 건 애초에 있지도 않은 것이라고. 우리가 바라보는 그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그 메시지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안타깝게 여기게 하지만 단순히 안타까움과 후회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박혜수의 이번 전시에서 나타난 작품들은, 살짝은 아프기도 한 자각과 더불어 우리에게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 남들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닌 나만의 그 길도 충분히 정답이 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느끼게 한다.

* 첫 번째 작품 <  World's Best > 는 이미지가 첨부되어 않아 자료첨부로 첨부합니다.
[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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