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어떠한 ‘손’에 휘둘리고 있는가 - 퍼핏 애니메이션과 이지 트른카 [시각예술]

퍼핏 애니메이션, '손(The Hand)'(1965)과 이지 트른카
글 입력 2017.02.22 18:3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wallace_02.jpg2016-02-28+17_52_43.png
 
 퍼핏 애니메이션과 체코의 이지 트른카(Jiri Trnka)
  월레스와 그로밋’, ‘내 친구 펭귄 핑구’, ‘유령 신부등 추억의 애니메이션. 말랑말랑해보이는 고무 찰흙 인형들의 움직임이 그리 신기했다. 우리는 이들을 바로 퍼핏 애니메이션(puppet animation)’이라고 칭한다.
퍼핏 애니메이션은 말 그대로 인형 애니메이션이다. 나무 철사, 헝겊, 고무, 점토, 플라스틱, 스티로폼 등으로 만들어진 인형을 조금씩 변형시키면서 이를 한 장면씩 끊어서 촬영한다. 보통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라고도 한다. 영사하면 마치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표현되며
인형의 정교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untitled.png
 
체코는 인형극의 전통에서부터 비롯되어 퍼핏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강국이다. 체코인 이지 트른카는 초기 퍼핏 애니메이션의 기술과 존재 의미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최고의 퍼핏 애니메이터이다. 그는 동유럽 내에서 퍼핏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보고 즐기는 오락으로서의 존재를 뛰어넘어 사회적,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으로 발전시켰다. 19분짜리 짧은 단편, '(The Hand)'(1965)은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발표한 퍼핏 애니메이션이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체코는 독일로부터 독립을 한다. 공산국가로의 이행에 성공한 체코는 전체주의적 성향을 가지게 되고, 영화 산업도 정부 경영 아래로 들어간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개성적인 작품 생산이 제한 혹은 금지당하며 사회에 대한 물음 혹은 고발은 더더욱 제재를 당하게 된다. 때문에 당시 체코 영화 시장은 검열과 제제에 대해 많은 작가들이 영상 내에 모호하고 상징적인 무언가를 담게 된다. <>이 바로 그런 시대에 대항하는 매우 도전적인 작품이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 <손(The Hand)>
2.png
 
한 예술가의 집에 거대한 이 들어온다. 예술가는 그가 사랑하는 꽃을 위해 동그란 화분을 만들고자 한다. 손은 화분을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 예술가의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심지어 만들어 놓은 화분을 깨뜨리기까지 한다. 결국, 예술가는 손의 횡포에 굴복하여 그의 꼭두각시같은 존재가 되어 창살 안에 갇혀 화분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손을 조각한다. 손은 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예술가는 월계관을 벗어 던지며 전력을 다해 집에 도망쳐 문에 판자와 못을 박아놓는다. 그리고 손이 깨뜨리고 간 화분 속 꽃을 새로운 화분에 담아 다시는 깨뜨리지 않으려는 듯 장롱 위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계속 열리는 장롱 문에 그는 손이 다시 들이닥칠 것 같은 공포에서인지 다시금 판자와 못을 들고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이 화를 부를 줄 누가 알았으랴. 망치질의 진동에 장롱 위 화분이 예술가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그는 죽음에 이른다. 집은 어두워지고 손이 다시 들어온다. 장롱은 그의 관이 되고, 손은 그를 거울과 함께 관(장롱) 안에 넣어주며, 화분을 가져와 물을 주고 마치 장례 화한인 듯 관 앞에 놓아준다. 그리고 그 관 위에는 월계관을 올려주고 경례를 하는 손과 활짝 핀 꽃을 비추며 영상은 마무리 된다.
 
3.png4.png
  
손은 끊임없이 예술가를 방해했고 그의 자유, 감정, 창작 욕구, 삶까지 모든 것을 위협했다. 예술가는 처음엔 망치로 위협하거나 문 밖으로 손을 내쫓는 등 철저히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나, 손에 의해 정신적 육체적 지배를 당하게 된 후 손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으로 변한다. ''의 지배에 대한 강박적 사고가 크게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지 트른카는 영상 속 예술가의 모습에 당대 예술가의 위치를 투영시킨 듯하다. 반대로, 손은 국가 혹은 권력을 상징한다.
영화 말미에 꽃과 화분에 소중한 의미 부여를 하던 예술가가 조심스레 그것을 다시 회생시키지만, 장롱을 흔든 자신의 행위로 인해 소중히 여기던 화분에 맞아 죽는다. 화분을 지키려 손을 피했는데, 그 화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권력의 지배와 그 존재에 눈치를 보는 예술가들은 그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인가. 다시 손이 들어와 그를 관에 넣고 그 위에 이전에 그가 집어던진 월계관과 예술가의 모자를 올려놓는 행위는 무엇인가. 전시성 명예를 지닌, 즉 권력에 굴복한 예술가 또한 그 정신이 죽음과도 같다.
 
우리는 어떠한 ''의 힘에 휘둘리고 있는가
5.png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의 힘에 휘둘리고 있는가"? 자유의지는 인간을 보다 존엄하게 만든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동물성의 기계적 명령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끌어내야만 한다"고 하며, 모든 행위의 원인은 ''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했다. 내가 아닌 또 다른 ''의 힘에 휘둘려 그 자유를 잃게 된다면, 나 자신의 존엄성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나 자신, 나아가 우리의 화분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오롯이 만들고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영화 중반, 예술가가 손에게 정신적 지배를 당하기 이전에 손은 TV를 가져온다. TV는 세상의 다양한 손들을 보여준다. 여자 엉덩이를 만지는 손, 총을 쥔 손, 권투 글로브를 낀 손, 악수를 하는 협상의 손. 그리고 자유의 여신상의 손, 저울을 들고 있는 평등과 균형, 정의의 손. 이처럼 세상에는 많은 손들이 있다. 그것들은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어떠한 제재를 가한다. 물론 인간은 태생적으로 어떠한 구조적인 틀 안에서 자라오기 때문에 그 존재내 삶의 범위가 자연스럽게 결정될 수는 있다. 허나 자유는 이러한 정해진 삶의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도약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중요한 것이다. 나에 대한 타인의 제재를 정당화시킬 때,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의 소중한 화분이 무엇인지, 나를 방해하는 손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세상의 소중한 화분이 무엇인지, 그것을 통제하려는 손은 무엇인지. 19분의 짧은 시간의 <>이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염두에 두고 지내야 할 긴 선 하나를 머릿속에 그려놓았다.


 
[김수련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