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에도 달빛은 비춘다

희망을 노래하는 영화 '문라이트'
글 입력 2017.02.22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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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인류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합당치 못한 이유로 억압받은 두 부류를 꼽자면 흑인과 동성애자가 아닐까 싶다. 흑인들은 그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려 400년 동안이나 백인들의 노예 생활을 해야 했고, 동성애자들은 사랑을 이유로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공공연히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나마 좀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완벽하게 차별에서 풀려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회구성도 내에서 흔히 ‘밑바닥’ 취급을 받기 일쑤다.

 이 영화의 주인공 샤이론은 흑인이자 동성애자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마약중독자라서 집안 사정은 항상 궁핍하고, 애정도 충분히 받지 못한다. 그리고 덩치가 작고 숫기가 없어서 또래들에게도 항상 괴롭힘을 당한다. 이렇게 그는 온갖 사회적 약점들을 다 갖추고 있다. ‘밑바닥’에서도 가장 깊숙이 낮은 곳에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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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샤이론 : Little


  영화는 3막으로 나뉘어 각각 샤이론의 유년기, 사춘기, 청년기를 그려낸다. 각 막마다 해당되는 이름이 다른데, 첫 막의 이름은 그가 놀림 받을 때 불리던 별명인 ‘Little’이다. 소심한 그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이 부르는 대로 ‘Little’이 되고 만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된 후안이라는 마약상과 함께 어울리게 되면서 점차 변화하게 된다. 후안은 그에게

‘너는 세상의 한가운데에 있어.’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이런 말들을 건네며 그의 주체성을 키워준다. 그래서 샤이론은 더 이상 스스로를 ‘Little’로 인식하지 않는다.

  조건 없는 사랑과 신뢰를 베푼 후안은 샤이론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소중한 인물이 된다. 그래서 훗날 샤이론의 인생, 그리고 영화의 전반적인 주제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다.
(이런 중요한 역할을 찰떡같이 잘 소화해낸 결과, 극중 후안 역을 맡은 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는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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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샤이론 : 샤이론


  2막에서의 그는 본명 그대로 ‘샤이론’이다. 사춘기에 이르러 ‘Little’이라는 유치한 조롱에서는 벗어났지만, 마약중독자인 어머니, 궁핍한 생활,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은 변함이 없다. 설상가상 후안까지 사고로 죽게 된다. 이 환경은 마치 이름처럼 그의 선택이 아니라 외부 상황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가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이런 괴로운 나날 가운데서도 그의 곁에 혼자 남아주는 이가 있다. 바로 어린 시절부터 쭉 친구인 케빈이다. 모두가 딱딱한 본명만을 부르는 와중에 케빈만은 그를 자신의 애정을 담은 특별한 별명인 ‘블랙’이라고 부른다.

 달이 밝은 어느 밤, 둘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다 문득 맞닿은 눈길에 이끌려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샤이론은 자신의 성 정체성과 케빈에 대한 감정을 확실히 깨닫는다.
하지만 꿈같은 시간도 잠시, 둘은 불의의 사건에 함께 휘말려 멀어지고, 샤이론은 감옥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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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샤이론 : 블랙

 
 3막의 이름은 ‘블랙’. 케빈이 지어준 별명이자, 처음으로 샤이론 본인의 의지에 따른 이름이다. 20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여태까지 보였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건장한 몸에 차갑고 권위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마약상을 하며 돈을 번다. 직업이나 외모가 후안과 사뭇 닮아있지만, 무뚝뚝한 성격만큼은 그와 반대다.

 이러한 생활 중 갑자기 오랜만에 케빈에게서 연락이 온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그는 그 뒤에 케빈이 등장하는 꿈까지 꾸고서 자신이 아직도 케빈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케빈은 그에게 오래 전의 사건에 대해 미안함을 전하고, 더불어 간만에 찾은 어머니에게서도 잘 보살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를 듣게 된다. 그렇게 묶여있던 매듭들이 하나씩 풀려나간다.
 
 긴 거리를 달려 케빈을 만난 샤이론은 차가운 성격 속에 숨겨놓았던 자신의 본모습과 애정을 조심스레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다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보듬어준다. 이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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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삶은 이어진다. 샤이론과 케빈이 훗날까지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섣불리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샤이론은 계속해서 불행과 행복을 번갈아 겪는다. 아버지를 대신해 그를 성장시켜준 후안은 별안간 죽어버렸고, 사랑을 가르쳐준 케빈은 그가 감옥에 간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니 사랑이 이뤄진 후에도 악재는 얼마든지 닥칠 수 있다. 그들은 궁핍하고, 마약을 팔고, 흑인이며 동성애자인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이다. 비극으로 끝났던 먼젓번 두 막들과는 달리 영화를 매듭짓는 마지막 막이 해피엔딩이었던 것은 바로 이 희망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지극히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샤이론에게도 후안이 있고 케빈이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희망이었다. 힘겨울 때도 새롭게 찾아올 행복을 기대하게 만들어 주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들로 인해 그는 Little에서 샤이론으로, 샤이론에서 블랙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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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 영화의 제목이 <문라이트>일까? 나는 샤이론과 케빈의 재회 후, 홀로 해변에 서서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을 담은 엔딩 장면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달이 밝은 밤인지 해수면이 달빛을 반사해서 아름답게 반짝인다. 카메라는 달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만 보고도 달이 얼마나 밝은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굳이 위를 올려다보지 않아도 달빛이 너무나도 찬란하기 때문이다.

 달빛은 어디에나 비춘다. 아름다운 바다에도, 높은 산꼭대기에도, 그리고 세상 가장 밑바닥에도. 행여 구름에 가려진다 해도 달빛은 여전히 비춘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굳이 찾아서 꺼내보지 않더라도 희망은 항상 그 자리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다. 아무리 비참한 삶일지라도 희망은 차별 없이 빛난다.

 흑인 노예들의 희망은 19세기 중엽 노예 해방을 이뤄냈고, 동성애자들의 희망은 1973년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동성애가 정신병이 아니라는 공식 성명을 내게 했다. 나아가 지난 2009년 미국에서 버락 오바마가 첫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15년엔 미국에서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되었다.
 그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희망을 놓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니 비참한 삶일지라도, 희망을 잃지 말고 나아가길. 밑바닥에까지 달빛이 비춘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길.
 
 
[명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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