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피의 비에 흠뻑 젖어들다_혈우

글 입력 2017.02.2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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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수요일, 공연예술창작산실 우수작품으로 선정된 극단 M.Factory의 <혈우>를 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난 뒤 바로 대학로로 향했다. 무협활극도, 대학로 예술극장도, 한 극단의 작품을 두 번째 보러 가는 것도 처음이기에 익숙함이 묻은 설렘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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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협활극 

 <혈우>는 무엇보다도 무협활극이라는 독특한 극 형태 덕분에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가 굉장히 많았다. 단순히 흉내만 내는 움직임들이 아니라 사극 드라마의 격투 장면을 보는듯한 화려하고 완성도 높은 무술이 펼쳐졌다. 26명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배우들이 무대 위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호흡이 잘 맞았고 격한 움직임에도 대사가 정확하게 전달되는 데서 연습량이 대단했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엔 극이 부산스럽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했다. 30명에 이르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다 같이 무술을 선보이기라도 하면 정신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6명의 배우들이 모두 나와 혈투를 벌이는 장면의 경우 조명으로 특정 무리들을 비추고 어둠에 남은 배우들은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이는 등 연출을 통해 관객들이 무대에 충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렇듯 배우들의 연기와 무술, 연출에서 무협활극의 특성을 나름의 방식으로 최대한 완벽하게 구사하려 노력한 점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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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의 논리 

 눈과 귀를 매료시키는 극의 화려함에 비해 그것이 담아내는 스토리는 어둡고 잔인했다. 극은 고려 무신정권 말기 몽골에 투항하고자 하는 아버지 최항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최의와 노예 출신이지만 최항에게 충성하며 최고 장군의 위치에 서있는 김준이 대립구도가 주를 이룬다. 아버지의 나약함을 비난하며 강력한 무신정권을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반대세력을 모조리 숙청하는 폭군의 모습을 띈 최의와 달리, 최항의 뜻을 따르고 싶어 하는 김준을 최의는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에 그는 김준을 자신의 라이벌이 아닌 자신의 ‘개’로 두고자 김준이 사랑하는 여인, 최씨 가문의 기생 안심이를 이용한다. 김준은 갈등 끝에 안심이를 포기하고 최의를 처단한 뒤 문신들로 이루어진 왕조를 다시 일으킨다. 

 극의 마지막에서 김준은 또다시 왕조의 반대편에 서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신이든 문신이든 누가 정권을 잡든 기층민중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기득권들은 사라져야 하고, 그래서 왕조도 끌어내려야 한다고. 

 <혈우>의 전반을 이루는 최의와 김준의 갈등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최의를 악당으로, 김준을 영웅으로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김준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과연 김준이 왕조를 쳐낸다면 이후 자신에게 흘러올 힘의 물줄기 속에서도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평등한 세상을 꿈꾸고, 힘의 잔인함에 몸서리쳤던 김준으로 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은 고이면 썩기 마련이고, 사람을 변화시키며, 결국 영원한 건 힘뿐이라는 것을 역사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익히 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고려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힘’이라는 논리, ‘힘’이라는 물줄기는 <혈우>에서 칼과 칼의 부딪힘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그 끝에 뿌려진 피비린내를 통해 보다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너무 많은 걸 담아내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혈우>를 보기 전부터 무협활극이라는 장르와 세상을 지배하는 힘에 대한 사색이 만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무대와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두 가지가 주는 느낌과 분위기가 정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공연에는 생각지 못했던 러브스토리와 신분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뒤엉켜 있었다. 
 물론 신분의 경우 오랜 시간동안 인간이 오만하고 쉽게 힘을 행사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구조이기에 뜬금없진 않았다. 하지만 최씨 가문의 기생 길향과 안심이는 <혈우>의 참신함을 반감시키는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길향과 안심이의 캐릭터 자체는 극에 활기를 더해주었으나 길향이 최의의 아이를 갖고, 최의가 안심이를 이용해 김준을 이용하려 하고, 결국 김준은 안심이 하나를 위해 팔 하나까지 내놓겠다고 하는 등 관객들에게 너무 익숙한 러브스토리가 펼쳐지자 다소 진부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배우들의 명연기, 지루하지 않은 액션, 개성 있는 캐릭터는 극에 푹 빠져들어 즐기기에 충분했고, 과거와 현재를 꿰뚫는 스토리는 극의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오는 2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펼쳐지는 ‘피의 비’에 많은 이들이 흠뻑 젖어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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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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