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인간애'라는 모범답안을 던지다

글 입력 2017.02.2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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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가 되기 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념갈등으로 인한 분단의 아픔을 겪던 나라, 독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기억하는 세상에서 독일은 줄곧 한 국가였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를 크게 실감하지 못하던 중, 우연찮게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을 접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슈타지. 비밀정보기관이자 정치비밀경찰기관, 사법조사기관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던 동독의 국가 정보기관을 말한다. 우리나라 독재시기에 중앙정보부(중정),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다 독일 통일과 함께 해체된 이 기관은 공식 요원과 비공식 요원 총 21만 명 정도를 두었는데, 그들의 역할 중 하나는 ‘반체제 인사의 색출 및 탄압’이었다. 2007년 개봉한 영화 <타인의 삶>은 바로 이러한 동독 비밀경찰에 대한 이야기다. 


movie_image.jpg▲ 영화 <타인의 삶> 中, 네이버영화
 

 비밀경찰인 비즐러(율리히 뮤흐)는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연인이자 배우인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일을 맡는다. 처음엔 단순히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데 최선을 다하던 비즐러는 그들을 하루하루 감시할수록 오히려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중 드라이만이 서독 잡지에 동독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붙잡힐 위기에 처하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드라이만을 보호하고 능력있는 비밀경찰이었던 그는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우리나라는 공산주의가 아니지만 휴전선 너머 북한의 존재, 그리고 독재의 역사 때문인지 시대적 상황과 비밀경찰의 모습에는 안타깝게도 큰 감흥이 없었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익히 체감하고 체득한 내용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조용하고 무미건조한 영화가 가슴을 울렸던 건 공산주의의 두려움도, 탄압의 잔인함도 아닌 오로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에 대한 비즐러의 ‘애정’때문이었다. 


movie_image (1).jpg▲ 영화 <타인의 삶> 中, 네이버영화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은 보통 대상이 가족, 친구, 연인, 혹은 동료처럼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끊임없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 생겨난다. 물론 직접 얼굴을 대면하지 않아도 애정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연예인이나 유명인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친밀도와 상관없이 외모 혹은 능력 면에서의 우수함이나 희소성이 팬심을 자극한다.민족, 지역, 국가라는 테두리도 마찬가지로 애정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조금씩 다른 형태의 애정이지만 ‘기준’을 가지고 발생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movie_image (2).jpg▲ 영화 <타인의 삶> 中, 네이버영화
 

 하지만 두 사람을 향한 비즐러의 감정은 이와 같은 기준이나 이유가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비즐러는 두 사람과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었음은 물론이고 외모나 예술인으로써의 능력을 동경하지도 않았다. 같은 지역이나 같은 동독 사람이라는 요소 역시 전혀 중요시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지켜보았을 뿐이었다.드라이만의 생일파티를, 크리스타와 나누는 사랑과 갈등을, 가까운 동료의 죽음으로 인한 드라이만의 슬픔과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 과정 속에서  비즐러는 그를 반체제인사가 아닌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드라이만에 대해 어떤 틀과 기준을 뛰어넘는, 오로지 사람 냄새에 뿌리를 내린 애정, 바로 인간애를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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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S를 통해 알게 된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인 ‘김’과 82년 가장 많이 등록된 여아의 이름인 ‘지영’을 가져와 82년생 김지영씨가 30대 중반이 되기까지 여성이기에 겪어야 했던 에피소드들을 일대기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바바리맨을 만난 이야기에서부터 남동생에게 차별당한 이야기, 술자리에서 남자들의 성차별적 발언을 묵묵히 들어야 했던 이야기 등 여성이라면 한 번 쯤 겪어봤을 법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들과 함께 작가는 그 때마다 느껴야 했던 감정들까지도 세밀하게 그려낸다.
 
 물론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영화 <타인의 삶>은 장르도, 배경도, 국가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다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과 일상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만큼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제목 없음.jpg▲ 영화 <타인의 삶> 中 캡쳐본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남성 독자는 자연스레 영화 <타인의 삶>에서 비즐러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비즐러가 드라이만보다 높은 지위에서 그의 삶과 일상을 낱낱이 보고 들었던 것처럼, 이 책을 통해 사회적으로 여성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남성들은 여성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차별, 혐오, 위협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김지영씨의 삶과 일상을 ‘도청’하고 ‘모니터’함으로써 남성들은(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김지영씨를 반대편에 서있는 여성이라는 집단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비즐러가 드라이만을 오로지 ‘드라이만’이라는 사람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이를 통해 김지영씨가 겪는 공포와 두려움, 불편함을 단지 한 인간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혐오의 시대다. 세상은 참 많이 변했으나, 여성과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으며 그로 인한 갈등은 일상에서 불쑥불쑥 터져 나오곤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정책들이 마련되고 있긴 하지만 과거 신분제가 그러했듯이 이는 감정과 인식의 문제로, ‘이해’가 기반이 되지 않는다면 교묘한 방식으로 그 모습만 달리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82년생 김지영>은 하나의 모범답안을 내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지영씨의 몸과 마음을 빌려 여성들의 하루하루와 인생을 담아내고 그 속에서 겪는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인간애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다른 인간으로 하여금 상대를 이해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상대가 여성이든, 성 소수자든,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어쨌든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니 말이다.


 친한 친구가 자신이 성 소수자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 그 친구에게 조심해야할 것이 있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을 이성애자로 알던 예전과 똑같이 대해주면 그 뿐이라고 대답했다. 남들과 다르게 대하길 바라지도 않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편하게 물어보고 궁금해해달라고.
 여성이든, 성 소수자든 그들의 생각, 감정, 일상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볼수록 알게 되는 것은 트집잡을 꼬투리가 아니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뿐이다. 김지영씨가, 여성인 내가, 나의 친구가 그렇듯이. 차별과 혐오로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은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상대를 인간으로서만 바라보면, 인간애를 가지고 바라보면 단순명료해진다는 것. 영화 <타인의 삶>과 <82년생 김지영>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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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암보암?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감정과 느낌의 응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예술로부터
감정과 느낌이 가진 모습들을 평범하게, 동시에 독특하게 풀어내어
보암보암이란 이름처럼 따듯하고 몽글몽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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