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디선가 표류하고 있을 당신에게 : 『김씨 표류기』 [시각예술]

글 입력 2017.02.0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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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김씨 표류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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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준, 김씨표류기, Castaway On The Moon, 2009)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침대에 누워 새벽이 내려앉는 것을 바라보고는 한다. 까만 공간 속에서 눈을 뜨고 있노라면 난파선 위에 누워 구조를 기다리는 어느 어린 선원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천장에 막혀 보이지 않는 별을 세고, 멀리서 들려오는 이명 같은 아침을 듣는다. 이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어서 새벽이 왔으면 하는 모순적인 마음이 불쑥 침대로 올라온다. 그렇게 새벽의 어스름과 함께 잠에 든다. 고민이 가득한 시기에는 매일 이런 일련의 과정을 밤과 새벽 사이의 공간 속에서 해야만 했다. 가끔은 울기도 했고 또 가끔은 아침이 돼서야 커튼을 치고 잠에 들 수 있었다.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는 혼자 있는 것이 싫으면서도 혼자 있고 싶었다. 외로웠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은 불편했다. 그 시기의 내 방은 시끄러운 사막이었다. 온갖 말라버린 고독이 곳곳에 묻어있었고 버석한 고독은 시끄럽게 제 존재를 알려왔다.

 우울증이 찾아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밤과 낮이 바뀐 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다. 방 문을 열고 나가기가 무서웠다.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웃고, 대화하는 것이 목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천천히 방문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나는 창문을 통해 세상과 마주했다. 단편적이지만 누구도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는 나의 유일한 소통로였다. 부모님은 일이 바빠 홀로 멀어져 가는 내게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유서를 썼지만 그건 일기에 더 가까운 글이었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도, 스스로를 자책하는 마음 같은 것도 없었다. 당시 내게 있던 것은 허무함과 고독, 불안과 우울뿐이었다. 우울증이 나아진 것은 집을 이사하고 학교를 옮기면서였다. 생활환경이 달라지면서 조금씩 우울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본래 타고난 우울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 방의 사막에는 작은 오아시스가 생겼고 고독은 아주 가끔 지상으로 내려올 뿐, 구석으로 숨어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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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를 본 것은 우울증이 가신 한참 후였다. 불운한 삶 때문에 자살을 시도한 남자는 자살 실패로 한강의 밤섬에 갇힌다. 그는 죽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의 불운은 자살조차 그의 마음대로 되게 놔두지 않는다. 그렇게 남자 김씨는 한강의 밤섬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높은 빌딩과 화려한 유람선이 지나다니는 그 섬에서 표류자가 된 것이다.
 
 자신의 방이 지구이자 세상인 여자 김씨는 방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그녀는 방안에서 친구를 사귀고 여행을 다니고 물건을 사고 운동을 한다. 그녀의 세상은 10평도 되지 않는 작은 세계. 유일한 취미인 달 사진을 찍던 여자는 우연히 표류 중인 남자 김씨를 발견한다. 밤섬이 아닌 자신의 방안에 표류 중인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에게 리플을 달아주기 위해 조금씩 그녀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마친다.

 영화는 두 김씨를 통해 자신들의 무인도에 갇힌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정박되지 못한 채 끝없이 흘러가고 움직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무인도에 갇혀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간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혹은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무인도를 택한 사람들에게 영화는 두 명의 김씨를 통해 탈출을 위한 오리배를 보낸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울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과거 나의 무인도에 갇혀있던 내가 생각나 참을 수가 없었다. 내게도 누군가 오리배를 보내주었더라면, 리플을 달고, 나를 위해 짜장면을 시켜주었더라면 조금 더 빨리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을까? 영화는 단절된 이들에게 말한다. "괜찮아. 당신을 태울 오리배는 이미 준비되어 있고, 당신은 그저 이 배에 올라타기만 하면 돼." 하고 말이다.

 두 명의 김씨는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린 뒤 소통하기 시작한다. [HELP]라고 적혀있던 글자가 [HELLO]로 바뀌면서 두 명의 김씨에게는 균열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이윽고 균열의 틈으로 두 사람은 바깥 세상으로의 탈출을 결심한다.
 
 마침내 문을 연 여자 김씨와 밤섬을 나온 남자 김씨는 서로를 향해 인사를 건넨다.



2. 세상에 존재할 수많은 김씨와 표류 중인 김씨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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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지기 쉬운 물건이나 조심하게 다뤄야 할 물건을 택배로 보낼 때, 우리는 에어캡을 이용해 물건을 보호한다. 몇 번이고 물건을 감싸면서도 우리는 가끔 불안해한다. "혹시나 이 물건이 깨지면 어떡하지?"하고.

 옷장 속 에어캡을 이불 삼아 잠에 드는 여자 김씨는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 그 위험이란 것들은 육체적 위험보다도 정신적 위험에 가깝다. 그녀는 타인의 사진을 이용해 자신의 미니홈페이지를 꾸미고 그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한다. 그녀가 만든 가짜 세상에 대해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때면 그녀는 옷장 깊숙한 곳으로, 더 깊숙한 에어캡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가 만든 안전한 그녀의 세상은 결국 위태로운 돛단배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깨지기 쉬운 물건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물건보다 더 깨지기 쉬운 사람에게는 물건만큼의 조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물건은 말 한마디에 깨지지 않지만 사람은 한 단어로도 깨질 수 있다. 그녀, 김씨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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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희망의 사전적 의미는 '앞일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람' 혹은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밤섬에서 자급자족하는 남자 김씨에게 희망은 스스로 모든 재료를 준비해서 짜장면을 만들어 먹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게 무슨 희망이냐,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남자 김씨에게 짜장면은 그가 밤섬에서 살아갈 희망을 주는 존재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바라던 희망도 그리 엄청나고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남자 김씨가 짜장면을 만들기 위해 전분을 얻고 면을 만들던 것처럼 우리도 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잠을 줄이고 조금 일찍 일어나는 것들로 희망을 바라곤 했었다. 하지만 용기 낸 것들이 실패와 좌절로 돌아올 때마다 우리의 희망은 조금씩 줄어들어 마침내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망망대해 같은 바다 위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던져진 바다는 깊지도, 사실은 그리 넓지도 않다는 점이다. 언제든 손을 흔들면 달려올 오리배가 있고 조금만 둘러보면 어디선가 우리를 기다릴 또 다른 우리가 있다. 남자 김씨에게 여자 김씨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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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도 가끔은 침대에 누워 별이 보이지 않는 천장을 본다. 가끔은 고독이 함께하지만 망망대해 같은, 사실은 10평도 안 되는 작은 바다 위에는 언제든 켜질 준비를 하는 등대가 있고 나를 구하러 올 오리배가 있다. 새벽이 다가올 때면 창을 열고 잘 보이지 않는 별을 찾으면서 잠에 든다. 지나친 낙관주의자도 극심한 비관주의자도 아닌 나는 그저 평범한 20대의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우울은 존재하고 누구에게나 비극은 찾아온다. 단언컨대 지금 당신의 옆에 있는 우울과 비극은 결코 당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우울과 비극, 행복과 기쁨까지도 모두 당신이 소유한 것들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밤은 세상에 존재할 수많은 김씨와 표류 중인 김씨들을 위해 별의 빛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겠다. 당신의 항해가 온전히 끝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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