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생각] 그리운 파란만장

글 입력 2017.01.3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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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만장’, 이는 파도가 물결치는 것이 만장의 길이나 된다는 것으로 그만큼 시련이 많고 힘든 것을 말한다. 누구나 삶의 어떤 순간은 파란만장하다. 사랑을 잃어서일수도 있고, 꿈을 찾는 과정일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사건을 마주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각자가 기억하는 파란만장의 순간은 모두 제각각이겠지만, 모두가 살아가면서 그런 순간을 한 번쯤 겪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나에게 그런 순간이 왔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얼른 이 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였던 것 같다. 이 순간이 지나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물결치는 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지겠지, 하고 생각했다. 정말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엔 파란만장했던 순간들이 지나있곤 했다. 문제가 해결된 때도 있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것도 있지만 어쨌든 그런 격동의 시기가 계속되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파란만장했던 시간들은 조금씩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시간들로 인해 나는 성장했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운’이라는 수식어와 ‘파란만장’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고마운’ 시간들이기는 하지만, ‘그리운’이라는 것은 그 간절함의 정도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운’이라는 수식어는 왠지 ‘다시 돌아가고 싶은’이라는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인다.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라던 파란만장의 시간들이 그리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에 대한 궁금증이 나로 하여금 책장에서 ‘그리운 파란만장’이라는 시집을 꺼내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김왕노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운 파란만장

고맙다 파란만장아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출렁였고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슬퍼했겠고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아파했겠고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헤매다가
꽃을 보고 새를 만나고
그 먼 강둑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보았을까.

파란만장하니 인생이다.
파란만장하니 노래한다.
파란만장하니 사랑한다.
파란만장하니 그립다.
파란만장아 고맙다, 파란만장하니 고맙다.



   그렇다. 그 역시 파란만장을 출렁였고, 슬퍼했고, 아파했고, 헤매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기억하는 파란만장은 단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파란만장의 순간 출렁였고, 슬퍼했고, 아파했고, 헤맸지만 그 안에서 꽃을 보고 새를 만나고 강둑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보았다고 쓰고 있다. 분명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힘들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파란만장했다고 기억하는 순간일수록 그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들도 있다. 예컨대 그럴 때일수록 우연히 발견한 어렸을 적의 일기장이나 친구와 나눈 별 내용 없는 대화, 가족의 작은 응원 한 마디, 신문 한 귀퉁이의 따뜻한 기사가 나의 마음을 건드리곤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렇게 파란만장의 시간 속에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 ‘파란만장’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이런 작은 순간들이 행복하지만은 않은 파란만장의 순간을 잘 견디고 지나가도록 해준 것이다.

   시를 읽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리운’이라는 수식어와 ‘파란만장’은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파란만장한 순간이 있었기에 평소에는 잘 인식하지 못했던 작은 순간들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은 대단히 행복하거나 불행한 몇몇 순간이 아닌, 소소하고 일상적인 순간들이다. 실제 우리의 삶은 영화에서처럼 주요한 사건들의 나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건과 사건을 잇는 수많은 우연하고 작은 일들이,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스쳐지나갈 법한 일들이 오히려 우리 삶의 대부분의 구성한다. 파란만장 속에서도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수많은 작고 소소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파란만장은 단지 ‘출렁였고, 슬퍼했고, 아파했고, 헤매던’ 순간으로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한편 개인적으로 ‘파란만장’이 인생과 사랑의 전제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파란만장해야만 인생이고, 사랑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파란만장한 순간조차도 우리의 인생이고 사랑인 것은 분명하다. 한 번뿐인 삶의 매 첫 순간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때론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은 때론 굴곡질 수 있고, 우리의 사랑은 때론 어설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마저도, 우리의 인생이고 사랑이고 삶이다. 이것이 ‘출렁였고 슬퍼했고 아팠고 헤맸어도’ 우리가 그 시간까지도 포용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파란만장하니 인생이다./파란만장하니 노래한다./파란만장하니 사랑한다./파란만장하니 그립다./파란만장아 고맙다, 파란만장하니 고맙다,’는 마지막 연은 파란만장했던 순간마저 온전히 자신의 인생으로, 사랑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파란만장’으로 기억되는 순간은 모두에게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그렇다고 느낄 수도 있다. 개인이 기억하는 파란만장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며,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떤 시간을 지내왔는지 우리는 서로 그 깊이를 알 길이 없다. 그렇기에 섣불리 파란만장은 사실 고마운 것이라거나, 그리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시간들을 조금 달리 볼 수 있다면, 그 안에서 ‘꽃을 보고 새를 만나고/ 그 먼 강둑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그런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쉽게 보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어둡기만 했던 시간 속에서 또 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간절한 마음에서 조심스럽게 글을 써본다.


[노혜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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