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아한 파괴, 백조가 된 소년 : 『빌리 엘리어트』 [시각예술]

글 입력 2017.01.2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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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보고 자란 것에서 인생을 배우고, 기껏해야 그보다 한 뼘 더 꿈을 꾼다. 우리가 그 한계를 벗어난 성공담에 열광하는 것은 그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이다. 개천에서 난 용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 중에 『빌리 엘리어트』 가 특별한 이유는 몰락해가는 탄광마을의 무뚝뚝한 소년이 그 동네 사람들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날아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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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네이버 이미지)
 

 영화는 남성성의 파괴와 고정화 되어 있던 Gender를 벗어나 재투성이 소년이 백조가 되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복싱같은 것만이 진정한 남자의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남자가 발레를 할 수 있다고 잽을 먹인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와 형처럼 평범한 탄광촌 노동자가 되었을 것이 뻔한 빌리는, 자신의 꿈을 위해 토슈즈를 신고 스트레칭을 한다. 마침내 백조가 되어 날아오르기까지 빌리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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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네이버 이미지)


  『빌리 엘리어트』는 성장영화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아버지와 아들이 갈등을 해소해나가는 과정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성장은 소년이 먼저였지만, 소년의 아버지 역시 성장한다. 아들의 재능을 인정한 아버지. 강인한 남성성을 바라는 아버지의 변심은 아버지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영화의 “성장”이라는 테마를 관통한다.

  『빌리 엘리어트』를 다시 보게 된다면, “성장”을 벗어난 영화의 배경이 보인다.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의 신봉자였던 마가렛 대처가 빚어낸 광산 공동체의 와해로 인해 폐해를 잔뜩 뿜어내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인민을 짓밟고 일어섰는지, 노동자들은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대처해야 했는지 등 영화는 신자유주의로 인해 피폐해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빌리가족과 빌리의 마을 사람들을 조명한다. 결국  『빌리 엘리어트』는 단순한 성장영화를 넘어 직간접적으로 영국의 정치 배경을 보여준 것이다.

 영화는 연대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광부노조의 이야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빌리와 친구들, 마이클과 발레 선생님이었던 윌킨슨 선생님. 그리고 빌리의 진학을 위해 없는 살림이지만 삼삼오오 돈을 내놓는 탄광촌의 동네 사람들까지. 빌리가 살던 곳에서 느낄 수 있던 짠한 공동체. 당장 눈앞에 닥칠 붕괴 앞에서도, 공동체의 아이를 위해 주머니에서 페니를 꺼내는 사람들. 파업에 맞서 싸우는 탄광촌 사람들이 거칠고 피폐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은 공동체를 위해 힘쓰고, 어린 빌리를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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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네이버 이미지)


 남자다움에 대한 생산적 파괴. 『빌리 엘리어트』 곳곳에는 동성애 혐오증이 묻어난다. 거칠고 남자다운 광산의 남자들과 거기서 연상되는 정형화된 이미지와 편견. 특히나 권투를 강요하며 남자답게 싸우라고 말하는 모습에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Gender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남자는 강인하고 거칠어야 하며, 절대로 부드럽거나 약해서는 안 된다. 발레나 음악 같은 예술보다는 운동 같은 것을 해야만 진정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짐작해보건대 탄광촌의 많은 남성들은 게이처럼 비춰지기 싫어서 더욱 거칠고 강인한 모습에 집착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강인한 남성성을 요구하는 투쟁적인 탄광촌 사회와 여성성을 대표하는 발레를 배우기를 원하는 빌리의 욕구의 갈등 속에서 우리는 빌리의 *페르소나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초반에서 빌리는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레를 권유하는 여자 아이에게 “난 게이가 아니야”라고 말하며 관심 없는 듯 지나쳐 버린다.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의 역할에 충실하려 하는 것이다. 이후 빌리는 발레를 시작하게 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화장실 안에서 연습하거나, 도서관에서 몰래 발레에 관한 책을 훔치는 등의 행동을 하며 자신의 페르소나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어쩌면 빌리의 아버지와 형이 단호하게 발레를 반대했던 건 은연중에 학습되어 있던 동성애 혐오와 Gender적 기질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광산의 힘든 노동과 시위로 일생을 살아왔을 그들에게 남자가 발레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념을 거스르는 일일 수도 있다. 더구나, 그게 아들이자 동생이 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고수해온 남성성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인 것이다.

 빌리는 아버지 세대에서 형에게 까지 묻어난 남자다움을 생산적으로 파괴했다. 여기서 기존의 남성성을 지키려던 관념과 자신의 천복을 따르려는 빌리의 내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윌킨슨 부인의 도움이 크다. 윌킨슨 부인은 발레가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고정된 남성성을 파괴하는 힘. 빌리의 이러한 힘이 진정한 “남자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는 남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 즉 동성애 혐오증이 어떤 식으로 소년을 가둬놨는지를 보여준 영화다. 빌리는 마초 옷을 찢고 나온 용감하고 바람직한 어른이었다. 성인이 된 빌리가 <백조의 호수>에 등장해, 멋있게 도약하고 비상하는 장면을 우리는 뇌리에 깊숙이 기억하고 있다. 빌리가 이뤄낸 남자다움의 생산적 파괴가, 남자다움에 포박되지 않고 당당하게 도약한 모습이 ‘남자다움’의 진짜 의미를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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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네이버 이미지) 


 윌킨슨 부인은 빌리를 성장시킨다. 그러는 동시에 빌리 역시 윌킨슨 부인을 성장시킨다. 비단 빌리만 윌킨슨 부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윌킨슨 부인은 빌리의 재능과 열정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보고, 새로이 열정을 얻을 수 있었다. 윌킨슨 부인은 그 누구보다 빌리의 재능을 일찍 발견한 사람이다. 또 누구보다 빌리의 재능을 인정해준 사람이다. 즉, 윌킨슨 부인의 열정은 빌리가 훌륭한 발레리노가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둘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함께 성장해나간다.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고 앞으로 한발짝 나아갈 용기를 얻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멘토가 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서로의 버팀목이 되었고, 이는 서로를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영화는 멘토와 멘티의 정확한 표본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영화 속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남성적 요구를 하고 있으며 그런 요구가 빌리는 부담스럽다. 빌리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글러브를 통해 빌리가 남성적 전통을 답습하기를 바라며 사회의 남성적 요구를 끊임없이 주입시키기도 한다. 빌리 역시 처음엔 그런 관념에 길들여지지만, 발레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게 되면서 사회의 편견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갈등이 생긴다. 이러한 편견과 갈등의 사이에서 빌리를 돕는 인물이 바로 윌킨스 부인이다. 그녀는 빌리의 재능을 확신하고 빌리에게 발레를 가르친다. 남성성의 강요로 인해 주저하던 빌리를 잡아주는 것도, 남성성의 틀을 깰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윌킨스 부인의 역할이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발레를 포기하겠다는 빌리의 말에 “영영 떠나려면 발레신발을 벗고 가거라.”라고 말하자 “아니요, 가져갈게요.”라고 답하는 빌리의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빌리를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빌리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흔들리는 빌리의 마음을 붙잡아주기 위해 빌리에게 말한 것이다. “정말 발레를 포기할 것이냐”고. 빌리는 그녀의 말에 끝내 토슈즈를 내려놓지 않는다.

 『빌리 엘리어트』는 단순한 성장영화를 넘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요소를 부각시킨다. 빌리와 발레라는 요소를 통해 사회의 성역할 기대와 충족을 한 번에 부숴버렸다. 대단히 우아하지만 파괴적인 이 영화는 멘토인 동시에 성 계몽적 역할을 하는 윌킨스라는 인물을 통해 관객에게 “진정한 남성다움이란 무엇이며, 성을 나누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시한다. 멘토는 빌리를 성공으로 이끄는 역할을 넘어 관객의 계몽을 도운 것이다.





*페르소나 - 자아가 외부세계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행동양식으로 융은 외적 태도라 불렀다. 인격에 있어서 페르소나의 역할은 유익할 수도 있고 유해할 수도 있다. 즉, 페르소나를 통해 사회생활과 공동생활에 적응할 수 도 있지만, 자아가 페르소나와 지나치게 동일시하게 되면 내적인 정신세계와의 관계를 상실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부응하는 인간이 되게 된다는 것이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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