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돌로 버려지면 어쩌나, 꽃으로 피었으면

글 입력 2017.01.1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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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하고 작별한지 겨우 보름하고 삼사일 더 되었을 뿐인데 아득히 먼 일로만 느껴진다. 타지생활 3년, 자취생활 2년. 서울 어디를 가도 그리 흥미롭지 않고 코딱지만한 자취방이 마치 내 집 같은 그런 익숙함이 새삼 깊어지는 시기다. 그렇다고 따뜻한 방구석에서 이불을 덮고 티비를 볼 때처럼 마냥 편안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그런 아늑함보다도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깥의 한기에 예민해지는 요즘이다. 학교를 떠나 사회로 나서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할 때가 된 20대 중반의 대학생에게 겨울의 찬바람은 마치 매서운 현실의 입김처럼 불어 닥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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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같이 현실의 문턱을 기웃거리고 있는 20대 혹은 30대가 가진 고민들은 다양하다. 그것은 취업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고시공부 혹은 창업에 관한 것일 수도 있으며 가시밭길을 걷더라도 꿈을 지켜내려는 자의 침묵하는 고뇌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물음표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결국 모든 게 두려움과 설렘이라는 두 가지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파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돌 하나, 꽃 한 송이

                         신경림                


꽃을 좋아해 비구 두엇과 눈 속에 핀 매화에 취해도 보고
개망초 하얀 간척지 농투성이 농성에 덩달아도 보고
노래가 좋아 기성화장수 봉고에 실려 반도 횡단도 하고
버려진 광산촌에서 중로의 주모와 동무로 뒹굴기도 하고

이래서 이 세상에 돌로 버려지면 어쩌나 두려워하면서
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 꿈도 꾸면서



 어느 시대에, 어떤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 시가 탄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두 문장에서 빛을 발하는 시인의 통찰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 국가, 세대의 경계를 뛰어넘어 우리의 생이란 매순간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 사이의 좁디좁은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여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진학을 향한 길, 사회진출을 향한 길, 배우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자녀를 엎고 걸어가는 길, 그리고 말년을 바라보는 길에서 우리는 발을 헛디뎌 두려움에 늪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가끔은 눈부신 미래를 꿈꾸며 한없이 설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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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잡다단한 인생사를 내 멋대로 뚝뚝 나누어놓긴 했으나, 그 길 위에서 나의 위치는 어느새 사회진출을 향한 길목에 서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친다. ‘원하는 길로 가도 괜찮을까,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걸까, 후회하면 어쩌지,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을 텐데’ㅡ고민한다고 나아질 것도 없는 질문들 속을 하염없이 서성이던 중 이 시를 만났다. 그리고 돌로 버려지는 두려움과 꽃을 피우고자 하는 설렘 사이에서 요즘의 나는 확실히 전자의 감정에 젖어 매일을 보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이러한 불안감은 인간이기에 겪는 숙명이라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왜 두려움과 함께 주어진 ‘설렘’이란 감정은 그토록 찾아보기 힘든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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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일에 싸인 미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거나 혹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일종의 공포를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킨다.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사회의 구성원들이 둘 중 어떤 생각에 더 많이 사로잡히느냐에 따라 그들이 속한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단편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겠지만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사회는 불안정을 의미하는 동시에 무한한 기회와 가능성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나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사회는 인간이라면 대체로 더 나은 삶을 꿈꾼다는 점에서 봤을 때 정반대의 차원에서 절망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성원들이 절망과 좌절, 무기력에 허덕이는 사회는 절대 건강할 리가 없다.
    
  심심할만하면 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N포 세대라는 말은 이제 고유명사처럼 다가온다. 취미, 연애, 결혼, 내 집 마련, 자녀 등 하나만 포기해도 안타까운 일인데,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안타까움과 슬픔에 무뎌진 채 ‘생존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내려놓는다. 이러한 N포 세대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세상을 넘어서 ‘앞으로 더 나빠질 것이라는 비관주의’에 빠졌다는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세상으로 내몰린 이들에게 설렘은 시답잖은 사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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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 송이가 피어나기 위해서는 그것의 근본이 되는 씨앗의 생명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N포 세대라 하여 세상을 탓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건강하고 준비된 씨앗이라 한들 지나치게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터를 잡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돌로 굴러다니진 않을까 두려워하는 이들이, 골목 한 귀퉁이에 핀 꽃이라도 되고 싶은 이들이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했을 땐 최소한 뿌리를 내려볼만한 땅은 되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다.


 현실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 두려움의 기저에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나 역시 마찬가지로) 무능함도 한 몫 한다는 건 인정해야한다. 정말 어떤 분야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판단이 선다면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한들 최소한의 자신감은 생기지 않겠는가. 어떤 어려운 시대에도 꽃을 피운 이들은 분명 있었으니까. 때문에 앞으로 남은 나의 대학 생활은 스스로의 무능을 파악하고 꿈을 위한 역량을 높이는데 주력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업자가 몇 백, 몇 천 명이 아닌 백 만을 돌파한 지금,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2017년, 우리 사회가 풀어나가야 할 커다란 과제는 좀 더 비옥한 땅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절망감이 아닌 무엇이든 꿈꿔볼 수 있는 그런 땅. 세상에 돌로 버려지더라도 조금 덜 아플 수 있도록, 더 윤기 있고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필 수 있도록 말이다. 2017년이 끝나갈 즈음엔 두려움과 좌절감에 짓눌려 함몰된 채 살아가기보다 가끔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마음껏 설레도 좋은 사회, 그런 우리가 되기를 한 해의 시작에서 나지막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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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암보암?     
: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감정과 느낌의 응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예술로부터  
감정과 느낌이 가진 모습들을 평범하게, 동시에 독특하게 풀어내어 
보암보암이란 이름처럼 따듯하고 몽글몽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모든 이미지 출처 구글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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