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이상에 빠져든 내가 좋다면_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글 입력 2017.01.09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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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가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사람도 아니고,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더욱 아니니.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종종 내게 너무 ‘이상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 질책하는 듯 한 말투에 항상 발끈하곤 했지만 중요한 건 그런 몇 번의 논쟁을 거치면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이상적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말로 이상적인 건 좋지 못한 걸까?그에 대한 답은 어떤 면에서 ‘yes'가 될 수 있다. 이상은 마치 신기루와 같아 눈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오로지 이상만을 쫓다보면 결국 사막 한 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은 한편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상에 닿아보았거나, 과거 속에서 이상을 찾는 이에겐 그것을 반추하는 것이 삶의 낙이며 언젠가 혹은 어딘가에 있을 이상에 대한 믿음은 오늘도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작부터 이상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은 이유는 이번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속 주인공 길이 굉장한 ‘이상주의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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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이자 미국인인 길은 약혼녀와 그녀의 부모님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온다. 자신의 이상이기도 한 황금시대의 파리와 유럽 거장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파리의 매력에 그는 흠뻑 젖어들기 시작하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한다. 때문에 쉴 새 없이 자신의 약혼녀에게 파리로 와 살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도 하지만 번번이 충돌하기만 할 뿐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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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중 우연히 파리의 밤거리에서 구식 자동차를 만난 길은 그가 생각하는 파리의 황금시대에서 내리게 된다. 놀랍게도 그곳엔 항상 동경하기만 했던 위대한 예술가들ㅡ헤밍웨이, 피카소, 스콧 피츠제럴드, 달리 등이 살아있었고 길은 그들과 한 사람의 동등한 예술가로써 대화를 나누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뿐만 아니라 피카소의 연인이자 고혹적인 여성, 아드리아나를 사랑하기도 한다. 이토록 이상하고 괴이한, 또 기적적인 일에 길은 마약에 중독되듯이 정신없이 빠져들어 자정이 되면 그 자동차를 타기 위해 밤길을 서성거린다. 이상이라는 황홀경에 젖어 허우적대고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굳이 매일 밤 불안하게 길가를 서성일게 아니라 아예 돌아오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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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던 길은 또 다른 우연으로 아드리아나와 더욱 깊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곳은 바로 아드리아나가 생각하는 파리의 황금시대였고 그녀는 길과 달리 곧바로 그곳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런 그녀에게 길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당신의 시대가 황금시대다. 
여기 사람들에겐 또 다른 황금시대가 있을 거다. 
여기에 남으면 여기도 현실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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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순간 깨달았던 걸까. 그저 1920년의 파리로 빠져드는 일을 즐기는 것만 같았던 길은 더 이상 그곳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파리에 남기로 결심한다. 결혼도,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라는 그의 타이틀도 잠시 접어둔 채.
 

 과거로부터는 벗어났으나 파리는 떠나지 않은 길의 결정은 내게로 와 끝없는 고민으로 이어졌다. 역시 이상은 빠져나와야 하는 구렁텅이 같은 걸까, 그래서 길은 이상 속에 남기로 한 걸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가 이상 속에 빠져든 스스로의 모습을 못 견디게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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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과거가 되어버린 2016년, 많은 대학생들의 버킷리스트가 그렇듯이 나의 버킷리스트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유럽 여행을 떠났다. 어쩌면 지난 2년이 넘는 대학생활을 한 번도 마셔보지 못 한 유럽의 공기, 한 번도 눈에 담아보지 못 한 유럽의 거리에 대한 동경으로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떠난 한 달간의 여행 동안 두 발이 저릴 때까지 걸어 다니며 보았던 보헤미아의 성, 미켈란젤로의 작품, 그리고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아드리아 해는 오랜 시간을 기다린 꿈인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기도 했다.

 낭만으로만 가득한 여행은 아니었다. 20일 넘게 고장 난 캐리어를 끌고 다녀야 했고 동양 여자를 쉽게 보는 몇 몇의 남성들 때문에 불쾌해야했으며 교통은 매순간 어려웠고 돈이 없어 1유로에 쩔쩔 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요즘도 하루가 힘들고 지칠 때면 여행지에서의 사진을 보며 위안을 삼는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내가 그랬듯이. 그건 유럽이라는 공간이 하나의 티끌도 남지 않은 완전무결한 장소여서가 아니다. 가보니까 유럽도 별거 없더라는 냉소적인 자기위로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다만 여행지에서의 사진 속 내 모습이, 혹은 사진을 찍은 렌즈 뒤에 선 내 모습이 좋았다. 그저 동경했던 어딘가에 두 발을 디뎌보고 신선한 공기를 심장에 가득 채워 가져가기 위해 끝도 없는 알바를 견뎌내고, 사진으로만 보던 그곳에 이젠 나의 기억이 겹쳐진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했던 그 때의 내가 멍청했지만 한편으론 사랑스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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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초반부를 장식하는 건 유럽이 진한 향기가 물씬 흘러넘치는 파리의 모습이다. 루브르 박물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 모네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연못 등이 사진첩을 펼쳐보듯 차례차례 등장한다. 모든 게 단지 파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 하고 광고하거나 공감을 얻으려는 의도에서였을까?
 길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상향인 황금시대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파리라는 도시 역시 누군가에겐 현실이며 자신이 그곳에 남는 순간 나고 자란 미국과 다를 바 없어진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파리에 남고자 했던 길의 마음 한 편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이상에 젖어들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의 처음에 나왔던 파리의 거리, 파리의 분위기, 파리의 공기, 파리의 역사와 같은 것들에 매료되어 못 이기는 척 그곳에 남을 만큼 무언가에 푹 빠져 든 스스로가 말이다.
 
 
 얼마 전 연희집단 The 광대의 10주년 기념 공연 <용용 죽겠지>를 봤었다. 사람들의 상상을 먹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살아갔던 용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사라져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공연이었다. 어찌 보면 단순히 용 자체에 대한 이야기 같았지만 사실 공연은 무언가를 상상하거나 꿈꾸지 않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넌지시 동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야기했다. 삶의 질을 결정짓는 기준은 연봉도 자동차도 아파트도 아닌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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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과 이상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인간이 꿈꿀 때에만 존재한다는 점만큼은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부정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사람은 세속적이며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아등바등 하는 게 인생의 단면 혹은 전부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상을 품는 것 자체를 괜히 질책하고 무시하는 건 더욱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스스로가 현실이라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이상 때문에 조금 더 행복해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땅만 보고 내 뿌리가 조금이라도 상처입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거보다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이처럼 해맑아질 수 있다면, 그 해맑아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이상이란 건 생각보다 괜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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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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