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간 존재의 상실-1부 : 『보이지 않는 인간』 [문학]

글 입력 2017.01.05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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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보호를 위해 간단한 줄거리만 적습니다. 보다 자세히 작품을 이해하고자 하시면 책을 읽어보세요!) 



 1. 『보이지 않는 인간』: 상실
 
 20세기 미국의 흑인 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는 랠프 엘리슨의 소설 『보이지 않는 인간』은 1952년에 출간되었다. 출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이 작품은 그동안 무시되어 온 흑인 문학을 미국 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특히나 이 소설은 흑인 소년이 미국 남부에서 북부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통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흑인 차별을 넘어 인간 상실, 혹은 인간소외의 본질과 인간 실존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에서 작가의 고찰과 철학을 알 수 있다. 

 소설은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던 시기,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백인 사회에 순응하면서 끊임없이 타인들에 의해 자신의 사회적인 역할을 부여받는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하던 '나'는 백인들이 보내준 대학에서 사소한 실수로 퇴학을 당하고, 총장의 추천서가 자신을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현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유일하게 자신을 인정해주는 곳이었던 할렘가의 동지회에서도 설 자리가 없어지면서 비로소 자신이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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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랠프 엘리슨) 


 입(口). 그러니까 말하는 권한을 부여 받은 인간 신체의 어쩌면 유일한 독보적 존재인 입(口)은 말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살과 뼈가 있고,
섬유질과 체액으로 이루어진 실체를 지닌 인간이다.
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존재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우선적으로 다뤄야 할 것은 존재의 상실에 대한 것보다 "존재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이는 곧 실존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으로 이어지는데, 이 실존에 대한 것은 2부에서 다루고자 한다. 존재한다는 것.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눈을 깜빡이는 당연한 것들을 누리는 동시에 "나"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이성을 지닌 존재. 우리는 이를 명사로 "인간"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이러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 속에서 "인간"을 상실한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한다. 동시에 "나"를 잃은 존재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실존하는 인간은 누구인 것이냐"고.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쉽게 답변할 수 없다. 위대한 철학자들 조차도 쉽게 답하지 못했던 "인간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이는 현 시대에서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의 위에서 "나"라는 인간에 대해 물어야 한다. 작가 랠프 엘리슨이 그의 작품에 내포했던 것처럼 "나"에 대해 정의할 수 있어야만 "나"를 상실하지 않고 살아있는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인간소외에 대해 고민한 마르크스와 사회 속 인간소외에 관련한 내용이다. 



 2. 마르크스적 소외

  마르크스의 자본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기계를 끌어들임은 사람들을 일터에서 쫓아내며,
그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영원히 실직자가 된다.”

 마르크스를 통해 한국 사회의 지나친 경쟁구조를 이해해보자면, 결국 우리는 인간소외라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기계를 통해 자본구조가 확대되면서 인간의 노동력은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본래적으로 존재해야 할 인간이 수단이 되어 구조 속에서 자본에게 시간과 육체를 저당 잡힘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이 수단으로 쓰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개인이 도태(淘汰)된다면 이는 개인의 삶이라는 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는 위험이 됨을 말한다. 수단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득불평등의 문제 역시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부의 생산과 분배를 둘러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소득이란 부를 의미한다면 생산에 있어 노동을 기여한 노동자에 비해 자본가는 노동을 하지 않았으나 분배에 있어 노동자보다 더 많은 부를 가져간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생산관계 속에서 불평등과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생산수단의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와 수단에 대한 통제, 임금상승을 추구하는 노동자 사이에 갈등적 줄다리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계급투쟁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현 사회에서 불평등은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납득할 수 없는 분배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데올로기를 통한 계급지배를 뜻한다. 우리는 자본가 계급의 왜곡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계급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순순히 계급지배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공공영역’의 부패와 변질을 들 수 있다. 공공영역이란 정치∙경제로부터 자율적인 공론의 장으로, 시민들의 자유로운 참여와 비판 그리고 토론을 통한 여론형성의 장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러한 공공영역이 위장된 이해의 공간으로 변질되고 자본가들을 위한 행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대중이 가장 흔하게 접하는 메스미디어의 변질은 비판적 공중 형성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메스미디어가 자본주의 조직에 의해 독점되고 이해되면서 정보의 제공자였던 미디어가 여론의 형성자로 변질되어 ‘선동’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소외되는 것을 경계했다. 이를 다른 시각에서 보았을 때, 단순히 계급 구조라는 담론을 넘어 인간소외가 가져오는 존재 가치의 상실과 그로 인해 이어질 "인간"을 상실한 존재들의 종말로 이어지게 된다. 상실의 종말. 어쩌면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존재"란 실존하는가에 대해 물을 차례인지도 모른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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