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올드위키드송을 끝낸 소통이란 이름의 음악 - 음악극 올드위키드송

글 입력 2016.12.23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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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위키드송을 끝낸
소통이란 이름의 음악

음악극 올드위키드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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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교수와 예민한 학생. 마슈칸과 스티븐의 첫인상이었다. 화를 내다가 스티븐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돌변하는 교수와, 결벽증이 의심되는 학생. 절대로 친해질 수 없을 것만 같던 둘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었다.



스티븐, 음악, 마슈칸

미국인과 오스트리아인. 이 두 사람의 차이는 극명했다. 미국 건물의 단조로움과 오스트리아 건물의 섬세함처럼, 미국 건물의 간결함과 오스트리아 건물의 화려함처럼. 그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 또한 달랐다. 스티븐은 딱딱 떨어지는 것을 원했고,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이뤄지길 바랐다. 마슈칸은 ‘한 번에 이뤄지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스티븐은 직설적이고 기술적이며, 마슈칸은 수많은 비유 속에 자신의 의도를 숨기며 감정적이다. 그런 둘이 처음으로 하나가 되는 지점이, 바로 음악이다. 

“사랑의 장미가 피어오른 가슴, 점점 커지는 사랑. 행복 하지만, 순간이야. 그 앞을 불협화음이 덮고있어. 다시 타오르는 사랑. 사랑과 갈망을 감출 수 없어.”

지금까진 단순히, 악보에 적혀져있는 기호대로 연주했던 스티븐은 처음으로 ‘가사’를 음미하고, 음악에 담겨진 감정을 음미하기 시작하게 된다. 마슈칸이 설명하는 가사는 기계적인 스티븐마저도 감정에 빠져들게 할 정도로 너무도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그 가사를 듣는 것 만으로도 눈물이 날 정도로. 음악을 통해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도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처음 하나가 되었던 것은 아주 잠시간 뿐이었다. 처음 이러한 경험을 겪어보는 스티븐은 흥분한다. 마치 레코드판에 기록하듯, 자신의 그 감정을 되새기고자 한다. 하지만 마슈칸 교수는 그를 허락하지 않는다. 기계처럼 스 순간을 반복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그 안에 의미를 들여다봐야한다고 말한다.

“슬픔과 환희의 공존! 아름다운 음악의 핵심이자, 드라마의 핵심이고, 우리 삶의 핵심이지!”

스티븐은 이 당시엔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지만, 당시엔 그걸로도 괜찮았다. 뜨거운 커피를 한 입에 들이 키고, 페이스트리를 한 입에 넣어버리고, 매 연주전엔 징크스 때문에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했어야만 했고, 늘 다른 이의 모자를 쓰고 있던 스티븐은. 마슈칸의 수업을 통해서 점점 변해나가기 시작한다. 그 변화는 미국의 그것처럼 빠르기 보다는, 빈의 그것처럼 느릿하게. 아주 점차적으로 일어난다. 단지 마슈칸과 음악, 그를 통해서 일어난다. 스티븐의 변화는 음악으로도 충분했다. 음악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변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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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스티븐. 마슈칸

1막 내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자주 유태인이 언급된다. 유태인은 거래에 정확하다는 것부터, 발트하임의 나치설은 인식도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다. 그 후에도 아름다운 음악엔 슬픔과 환희가 공존한다고 말했을 때도 스티븐은 그렇다면 유태인은 어떻냐고 묻는다. 스티븐은 자신은 유태인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게속해서 유태인의 이야기를 꺼낸다. 마슈칸은 그 애기가 나올 때마다 유태인을 단정 지어 말하거나 혹은 그들의 아픔에 대해서 폄하한다.

“세상엔 그들의 아픔보다 많은 아픔들이 있어! 왜 맨날 유태인의 아픔에 대해서만 말하냔 말이야.”

심지어 스티븐이 다하우 수용소에 가겠다고 했을 땐 ‘가봤자 유태인 시체밖에 더 쌓여있겠냐’고 말하기 까지 한다. 차곡차곡 쌓여온 대사들. 관객마저도, 왜 이렇게 유태인에 대한 언급이 잦을까 하고 의문을 갖게 되던 시점. 지금까지 쌓여온 것들은 스티븐의 고백을 기점으로 폭발하게 된다. 스티븐은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밝힌다. 마슈칸이 전에 유태인에 대해서 했던 말을 인용하며 ‘거래에 밝은 유태인이니만큼 나가봐아겠다’고 말하는 스티븐을, 마슈칸은 허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까지 시종 여유를 잃지 않던 모습과는 달리 쇼파에 주저앉아서 허망한 눈빛만을 보이는 마슈칸을 뒤로 1막이 끝난 후, 1막에서 끝자락만 보여졌던 폭발적 에너지는 2막에서 그 본 모습을 드러낸다.

다하우에 다녀와 오스트리아가 어떻게 유태인을 역사에서 지워나가고 있는지, 어떻게 그들을 대하고 있는지. 유태인의 아픔을 어떤 식으로 가리고자 하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한 스티븐은 비엔나를 ‘거짓으로 가득 찬 도시’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 분노는 마슈칸을 향한다. 지금까지 유태인을 매도하고, 폄하해왔던 그도 다하우로 향하는 기차에서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몰라!’라고 외쳤던 그 할머니와 같은 족속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이 유일하게 존경했던 사람인만큼 그 분노도 컸다. 음악으로 생겨난 존경은 ‘유태인’이란 민족적 아픔에 의해서 사그라든다. 슬픔과 환희의 공존, 드디어 선생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스티븐의 눈은 존경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마슈칸은 변명하지 않는다. 단지 스티븐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다. 

“내게도 말할 기회를 줘 미국인!”

마슈칸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옷 소매자락을 걷어서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보여줬을 뿐이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스티븐의 분노는 빠르게 사그라 든다. 음악으로 하나가 되었던 듯 헀던 둘은 유태인과 오스트리아인이란 것으로 다시 나뉜다. 그리고 둘은, 다시 ‘유태인’으로 하나가 됐다.



마슈칸,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 스티븐.

남의 말이 나를 찌르는 것 보다, 차라리 자신의 말이 자신을 찌르는 것이 덜 아프니까. 다른 사람이 유태인에 대해서 뭐라 하기 전에 스스로가 먼저 유태인에 대해서 나쁘게 말헀다는 마슈칸의 말은 고백이라기 보단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유태인이지만, 그 민족적인 특성만을 지녔을 뿐 그 아픔을 경험해보지는 못한 스티븐과 실제로 수용소를 경험하고 그 이후 오스트리아인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마슈칸. 둘은 ‘유태인’으로 하나가 됐지만, 온전한 하나가 되지는 못했다. 둘의 경험의 간극은 엄청났기 때문이다.

극 초반부 유머러스하게 멈춘 지 오래라고 했던 시계는, 마슈칸 그 본인의 시계일지 모른다. 마슈칸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그의 시간은 수용소에서 멈춰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그런 마슈칸에게 스티브은 계속해서 그때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애써 덮어두고 있던 것을 다시 들추어 내고자 할 때. 마슈칸의 초침은 다시금 박동하기 시작했다. 

마슈칸은 계속해서 자살시도를 하며 자신을 ‘끓인다.’ 1막 어딘가에서 커피의 깊은 맛은 많은 것들을 증발시켰기에 나온 맛, 즉 많은 것을 잃고서야 나온 맛이라 헀던 것처럼. 그는 자살시도를 통해서 자신을 ‘끓이’고 있다고 말한다. 약간의 생명을 조금씩 잃어가며 깊어지는 것이라고. 그 깊어짐은, 자신의 슬픔에서 도망치지 않고 마주하기 위함일지 모른다. 

스티븐과 만난후의 그 자살시도가 우연히 드디어 그 슬픔을 마주할 수 있을 만큼의 깊이에 딱 도달했던 건지, 혹은 99도에선 영원히 끓지 않는 물처럼 더 이상은 깊이의 진전이 없다가 스티븐으로 인해서 그 깊이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자살시도로 인해 마슈칸은 자신의 과거를 스티븐에게 말할 용기를 얻었다.

마지막 곡을 가르치며 갑작스레 시작 된 마슈칸의 고백에 스티븐은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슈칸은 계속해서 말한다. 43.44.45. 마슈칸이 갇혀있는 시간. 그 시간을 드디어 꺼내 보인다.

“봄이었어. 모든 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5월….”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5월, 시인의 가슴엔 사랑이 피어났던 그 5월. 마슈칸의 시계는 멈춰버렸었다. 스티븐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를 안는다. 둘 사이의 경험의 간극은, ‘공감’과 ‘이해’로 채워졌다. 음악으로 하나가 됐다, 유태인과 오스트리아인으로 둘이 되고, 다시 유태인으로 하나가 됐다가도 그 경험의 차로 둘이 됐던 둘은. 공감과 이해로, 다시금 하나가 된다.  ‘음악’을, ‘유태인’이란 슬픔을 함께 안고 있기에 둘은 하나가 되는 ‘환희’를 경험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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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슈칸, 스티븐, 소통.

미국인과 유럽인. 피아니스트와 보컬교수. 완벽하게 이질적이었던 둘은, 그 사이의 벽을 음악으로, 민족으로, 이해와 공감으로 하나씩 깨 나간다. 벽 없이 마주할 수 있게 된 둘은 드디어 손을 맞잡고 ‘소통’할 수 있게 됐다. 둘의 마음이 진정으로 맞닿아 있는 순간. 맞잡은 두 손은 각자가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직면할 용기를 줬다. 그렇게 직면한 상처는 많이 아팠지만, 괜찮았다. 혼자가 아니기에. 맞잡은 손이 괜찮다고 위로해 줬기에. 그렇게 둘은 상처를 딛고 일어섰다. 스티븐은 마슈칸과의 관계를 통해서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게됐다. 마슈칸은 유태인 시절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그 시절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 Old Wicked Song, 정말 지긋지긋한 이 노래, 이 상처여. 스티븐과 마슈칸은 오랜 상처를 음악이란 커다란 관에 넣어 떠나보냈다. 

앞으로도 스티븐은 모자를 쓸 것이다. 하지만 그 모자는 그 누구도 아닌, 스티븐 자신의 모자다. ‘어떤 모자라도 잘 어울릴 머리’라는 마슈칸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모자가 어떤 모자든 스티븐에겐 어울릴 것이다. 남의 모자가 아니라 자신의 모자이니 말이다. 

마슈칸은 앞으로 독일어따위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다시금 독일어를 쓸 것이다. 다만 유태인인 자신을 부정하는 용도가 아니라, ‘위대한 유태인’의 언어로 말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단지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기 때문이었다. 수업은 끝났지만 둘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마슈칸과 스티븐은 평생동안 수많은 것들을 나눌 것이다. 모든 것이 달랐던 둘은 소통했기에 하나가 됐다. 둘이 하나이면서도, 그 각자 각자가 더욱 완전하게 됐다. 진정한 ‘소통’이 이뤄낸 결과다. 이는 너무나도 흔해진 ‘소통’이란 말의 본질적인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이유다.  

올드 위키드 송. 지긋지긋할만큼 울려퍼졌던 상처의 노래는, 음악을 통해 이뤄낸 소통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됐다. 이제는 둘에겐 새로운 음악이 울려퍼질 테다. 어떤 음악이 울려퍼질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지금까지보단 희망찰 것이며, 둘은 '함께' 그 음악을 살아갈 것이다. 듣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의 선율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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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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