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세계적 그래피티 작가들의 뮤지엄 쇼, < 위대한 낙서 > 展

글 입력 2016.12.1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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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부터 시작된 <위대한 낙서> 전에 아트인사이트(www.artinsight.co.kr)의 초대로 다녀왔다.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가 7인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기대가 크면서도 어떨지 굉장히 궁금했는데 간만에 신선하면서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전시였던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번 전시에는 총 7인의 그래피티 작가들이 모였다. ZEVS, JR, Nick Walker, Crash, L'Atlas, JonOne, Shepard Fairey 순으로 전시관이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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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전시관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ZEVS(제우스)의 작품. 1970년대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제우스의 작품들은 위 사진에서 나타난 것처럼 유명 브랜드의 로고들과 흘림 기법이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집약될 수 있다. 회사 로고가 있는데 거기서 물감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 회사가 망했다는 생각이 번뜩 들 것이다. 제우스는 바로 그 점을 노렸다. 대중들에게 익숙한 브랜드들의 로고를 가지고 대중사회에 대한 비판을 가감없이 가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로 인해 제우스는 실제로 체포되거나 벌금을 문 경험도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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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의 바로 뒤에 이어 나오는 JR의 경우, 이번 전시에서 가장 어린 아티스트였다. 그리고 그는 그래피티 아트를 다루긴 하지만 사진을 이용한 작업을 더 많이 하는 아티스트였다.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작품이 적은 전시 파트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진을 이용해서, 그는 사회에 아주 많은 시사점을 던지는 예술가였다.



위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건물의 위쪽 난간에 사람의 눈이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단순히 눈이 아니라, 흰색과 검은색이 점점이 찍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난간에 서서 눈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파리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랐던 JR은 인종차별과 사회적 차별이 만연한 프랑스 사회에, 주류 백인들이 차별하는 유색인종들, 빈민들이 정말 차별받아 마땅한 존재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만든 것이다. 저 난간에 드러난 사진 속의 눈은 파리 빈민가 소년의 눈이라고 하는데, 과연 저 눈이 다른 사람들과, 정확히는 차별하는 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저 눈이 위협적인가 아니면 불쾌함을 일으키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때 결국 차별을 당연시하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추한 우월감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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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닉 워커의 작품들이 연이어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전시장 입구 바로 옆에 보면 I ♡ Seoul 이라 쓰인 그래피티 아트를 볼 수 있다. 바로 닉 워커가 이번에 만든 작품이다. 검은 중절모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은 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신사, '반달(Vandalism에서 유래)'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닉 워커는 이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하여 유머러스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웃음기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닉 워커가 그린 작품 중에 인상깊었던 것은 '반달'이 강에서 노를 저으며 커다랗고 붉은 나비가 떠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을 보는데 저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방향도 알 수 없고 갈 바도 알지 못하지만, 결국 불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것마냥 정처없이 어딘가로든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닉 워커에 이어 크래쉬와 라틀라스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크래쉬의 경우, 그래피티하면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바로 그 느낌이 충만한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현대적인 의미의 그래피티 선구자 중 한 명답게, 그리고 그래피티 자체가 탄생한 뉴욕 사우스 브롱스 출신답게 말이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에 비해 유독 크래쉬의 작품들은, 프레임에 담긴 작품들이 굉장히 확대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는 크래쉬가 의도한 바라고 한다. 크래쉬는 액자 틀에 담기는 아트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시 야외에 널린 벽이나 큰 버스와 같은 아주 너른 폭과 면에서 그림을 담아내는 아티스트이기 때문에, 이번에 그래피티 전시회에 걸맞게 자신의 작품을 확대시켜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 그 작품은 담겨있는 그 상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을, 관객들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라틀라스는 크래쉬에 이어서 보니 굉장히 더 신선한 아티스트였다. 그의 작품들은 무슨 미로모형 같기도 하고, 문자들을 각지게 만들어서 디자인한 것 같기도 한 느낌이었다. 어디서 본 것 같으면서도 어디서 봤다고 정확히 꼬집어 말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그런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사실 작품만 놓고 보면 그래피티 아트라고 느끼기 가장 힘든 파트였다. 라틀라스가 이렇게 독특한 분위기를 갖게 된 것에는 그가 이슬람 서예와 중국 서예에 관심이 많아 이를 배운 영향이 크다고 한다. 그래서 아주 현대적이면서도 동시에 동양적인 문양같은 느낌이 물씬 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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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틀라스에 이어 만난 존 원은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원의 전시관에는 라이브 페인팅 작품도 있었는데, 아주 원초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를 강렬하게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재미있었던 것은 위의 사진에 나오는 것과 같이 무언가가 잔뜩 그려진 것 같기도, 쓰여있는 것 같기도 한 화풍의 작품들이었다. 저렇게 무언가 가득 그려진 듯, 쓰여있는 듯한 작품들은 하나같이 존원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는 것이라고 한다. 존원의 본명은 정말 흔한 이름, 바로 John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철수 같은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존원은 수많은 존 중 하나라는 의미로 자신의 가명을 존원이라 지었고, 이를 작품 속에 수백번 수천번씩 담아내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그래피티 아트를 완성해나갔다. 자의식이 굉장히 뚜렷한 사람이지 않은가. 그래서 유독 그의 작품은 역동적인 느낌이 충만했고, 그 덕에 더욱 재미있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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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시파트는 쉐퍼드 페어리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트릿 브랜드 OBEY를 만들어 사업적으로도 굉장히 성공한 그의 작품들은, 위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굉장히 원색적이다. 쉐퍼드 페어리는 정말로 원색들을 위주로 사용하는데,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의 작품들은 마치 구소련의 선전 포스터들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실제로 쉐퍼드 페어리는 구소련의 선전 포스터들에서 굉장히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 시대의 선전 포스터들은 굉장히 원색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아주 효과적으로 메세지를 전달하여 사람들을 선동했기 때문이다.


미국인이면서도 구소련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쉐퍼드 페어리는, 또 한 번 아이러니하게도, 오바마의 열렬한 지지자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자신의 화풍을 백퍼센트 발휘하여, 그 누구도 의뢰하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 포스터를 만들었다. 소련미를 품품 풍기는 포스터가 Democrats를 지지하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하고도 효과적인 홍보가 되었던지, 나중에 오바마 대통령이 실제로 쉐퍼드 페어리의 포스터를 활용하여 선거 포스터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쉐퍼드 페어리는 이번 전시회에서 본 아티스트들 중에 가장 적극적으로 작품을 통해 정치적인 발언을 한 아티스트였다. 위의 사진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굉장히 재미있게 본 전시였다. 그래피티 하면 유럽에서 있을 때 보았던 그 거칠고 자유분방하면서도 조금 무섭기도 한 느낌만 떠올랐는데, 이번 < 위대한 낙서 > 전을 보면서 그래피티 아트도 훨씬 다채롭고 또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 내가 느꼈던 그 거침, 자유분방함, 그리고 무서운 그 느낌이 과거의 반달리즘적인 그래피티였다면 이제는 팝아트와 같이 현대미술의 정수로 분류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래피티 아트를 전시회로 접하다보니, 그래피티 자체가 가지는 그 파괴적인 역동성이 조금은 잦아든 것 같기도 했다. 그래피티가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 더욱 발전해가려면, 설령 전시회로서 미술관에 그래피티가 전시된다 하더라도 프레임, 그 액자틀 자체에 갇히지 않는 것을 확고히 보여주어야 할 것 같다. 마치 크래쉬가 이번 전시에서 자신감있게 그 모습을 보여주었듯 말이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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