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단지 '무하'라는 그림의 부재가 아쉬웠던, 알폰스 무하展

대단한 전시였다. 수많은 '무하'의 그림 속에서, '무하'라는 그림을 찾을 수 없던 아쉬움만 빼면.
글 입력 2016.12.14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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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무하'라는
그림의 부재가 아쉬웠던
알폰스 무하전


2016-11-18 23;53;21.PNG
 


우리는 포스터의 시대, 아니 상업예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술'보단 '디자인'이란 말이 더 자연스러운 시대. 그림엔 목적이 있는 것이 당연한 시대를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쉽게 '디자인'은 '예술'과는 다른 것이라 구분되곤 합니다.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디자인'인 시대기에, '예술'은 '디자인'과는 다른 더 특별한 무언가일 것이라고 혹은 순수할 것이라고 생각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이라 불리는 것들은 너무도 실용적이기에 ‘예술성’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알폰스 무하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습니다. 상업적인 예술, 혹은 예술적인 디자인. ‘예술’과 ‘디자인’의 접점에 말입니다. 

아르누보, 즉 장식적인 예술의 정점에 있던 무하의 전시답게, 전시장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부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천장에 늘어서 있는 아름다운 문양들! 전시 후반에 가서야 안 것이지만, 무하가 디자인 핸드북에 그려넣었던 문양이었습니다. 전시 입구부터 무하의 디자인이 얼마나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지를 확인한 후 시작 된 전시는 그야말로 화려함의 향연이었습니다.



고흐, 고갱…그리고 무하.

이 아름답디 아름다운 전시. 눈이 호강했던 전시에서 제가 느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한 시대에는 참 다양한 예술이 존재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어느 시대든 ‘아름다움’은 엄청난 힘을 갖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첫 번째 감상에 대해서 말하자면, 저는 무하의 그림을 보고서는 무심코 1900년대 후반을 떠올렸었습니다. 너무도 현대적인 느낌의 그림이라 차마 그 이전을 떠올리진 못했던 것입니다. 무하가 살아있던 년도를 보고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무심코, 1800년대가 생각했던 것보다 현대적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너무 고맙게도, 전시는 그런 제 통념을 빠르게 깨 주었습니다. 무하의 전반적인 삶을 말해주던 section1의 한 그림은 저를 한동안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1893-94 Mucha Gauguin and friends.jpg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파리 그랑드 쇼미에르 거리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에서 무하와 그의 친구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풀 고갱, 무하, 체코 화가 루데크 마롤드와 연인 안나’

고갱, 고갱, 고갱?! 제 눈은 ‘폴 고갱’이란 글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고갱이라면 고흐와 후기 인상주의를 함께하던, 고흐가 귀를 자르기까지 전까지 함께 살던. 그 화가 아닌가. 고흐, 인상주의의 시대의 화가가 대체 왜 ‘친구’라는 명목으로 무하와 함께 있는 거지. 혼란 속에 저는 무하와 고흐의 생애 년도를 바로 검색해 봤습니다. 

고흐는 1853년 3월 30일생, 무하는 1860년 7월 24일생이었습니다. 고작 7년 차이. 제가 느끼는 둘 사이의 간극은 엄청난데, 둘 사이엔 고작 7년의 차이만이 존재할 따름이었습니다. 물론 무하가 ‘포스터 예술가들의 별’이라고 불리며 칭송받던 시기, 혹은 지스몽다로 포스터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시기엔 이미 고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둘의 시대를 완전히 분리해놓고 생각하던 제겐 둘이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이던 무하의 그림이 사뭇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아름다운’ 그림에서, ‘센세이션’할 정도로 ‘충격적인’ 그림으로 말입니다. 

그 이후 바라본 무하의 그림은 모두 ‘시대를 초월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많은 예술들이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무하의 그림처럼 현대의 그림이라고 해도 위화감 없을 것 같은 스타일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무하스타일이 만들어 낸 무하의 아름다움

두 번째 감상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무하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고, 열광했다고 하는데요. 그 심정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2년여전, 처음 무하의 그림을 SNS를 통해서 접했을 때. 정말 무의식적으로 저장하고 몇 번을 들여다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무하의 그림은 그 누구에게 선보이더라도 감탄할 만큼 아름답고, 또 아름답습니다. 여성의 선을 너무나도 부드럽고 풍만하게 표현해낸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무하가 그려내는 여인들의 표정은 너무나도 다채롭고 아름답습니다. 그가 표현한 옷 주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거기다 미를 더해주는 것은 넝쿨 식물 모티프의 여러 장식적인 문양들, 즉 아르누보 양식이었습니다.


2016 알폰스무하-비잔틴 머리 금발머리.jpg
 Alphonse Mucha,Byzantine Heads: Blonds', 1897


놀라웠던 것은 그 수많은 그림에 그려진 문양이 모두 달랐다는 점입니다. 책의 표지 등엔 왼쪽 가에, 포스터엔 사방면에, 이 모든 것도 아니라면 인물 뒤의 원형 구조에. 무하 그림엔 ‘문양’이 그려지지 않은 그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문양들은 모두 제각기, 그 그림에 맞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양은 때론 바퀴가 됐고 때론 나무가, 때론 머리 장식이, 때론 용이 됐습니다. 꽃, 넝쿨나무 등의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 동일했음에도 어쩜 이렇게나 다른 문양들이 나올 수 있는지! 무하의 머릿속엔 꽃 백과사전이라도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계속해서 무하의 그림을 보다보니, 정말 이제는 ‘무하 스타일’이 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런 말이 나오게 됐는지도. 무하의 그림엔 정말 무하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이 있었습니다. 광고 그림인데 광고하는 물품보다 무하의 그림이 더 눈에 띌 정도의 독보적인 스타일 말입니다. 포스터를 통해 거리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전시장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무하인만큼 무하의 모든 그림은 ‘광고’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하나하나가 ‘작품’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포스터나, 과자 각, 달력 그림 등.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그린 그림에선 무하만의 철학이 아무래도 덜 느껴진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광고’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한, 무하가 철저하게 기획하고 그려낸 그림들보단 그 세계가 덜 느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쉬움을 달래준 것이 바로 무하의 여러 연작들이었습니다.


2016 알폰스무하-계절 봄.jpg
 Alphonse Mucha, The Seasons: Spring, 1900



저는 무하의 여러 연작들에서 더더욱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요. 사계절 연작은 물론 보석연작이나, 달과 별 연작, 예술연작 등. 각각 표현해낸 그림에서, 모티프가 된 것들을 떠올리면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특히나 예술연작의 경우, 예술들이 아무래도 추상적이다 보니 그 표현에서 무하의 세계를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그림만큼이나 궁금했던 '무하'라는 그림

2016 알폰스무하-파리 발 드 그라스 거리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사라 베르나르를 위한 포스터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jpg
 

"무하,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보통 전시에 가면 어떤 컨셉이면 컨셉, 어떤 작가면 작가, 어떤 화풍이면 화풍. 그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하의 전시에선 ‘무하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무하’ 본인에 대해서는 느낄 수 없었는데요. 작가 자체에 대한 이해가 약간 결여돼 있다보니, 마지막 즈음에 가서는 감상이 ‘이런 게 무하 그림이구나’에서 그칠 때도 있었습니다. 오디오 가이드를 들어도 이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디오 가이드에선 이 당시의 무하의 삶이나 생각보단 당시 분위기나, 이 그림이 ‘어떤 것에 대한’ 광고였는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뤘습니다. ‘무하’보단 ‘그림’이 앞섰던 것이죠.

물론 무하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적인 면모를 내세웠던 전시니만큼, 다른 부분이 묵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 있지만. 무하가 왜 하필 그렇게나 ‘여성’을 고집했는지, 무하가 사람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자 하고 포스터로 거리를 전시장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던 배경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무하에 대한 이해보단 그의 ‘대단함’만을 계속해서 보고 온 것 같다고 할까요? 물론 그림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워 전혀 지루하거나 무기력해지진 않았지만. 보통 전시를 갈 때 하나의 세계를 만나고 오는 기분으로 가는 저로서는, 약간은 아쉬웠습니다.

물론, 이런 아쉬움에도 여전히 무하의 그림은 너무도, 이 글 내에서 아름답다는 말만을 백번은 쓴 듯한 기분이 드는데도 또 그 표현을 써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또한 그가 현대 순정만화나 일러스트 등에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죠. 무하의 업적만으로도 전시 하나가 무리 없이 완성 될 정도입니다. 제가 느끼는 아쉬움은 단지 제 개인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만큼, 너무도 대단한 사람인 만큼. 더더욱 무하를 알 수 있었다면. 그의 그림을 보고 '아름다움' 그 이상의 가치를, 그 안의 무하를 느낄 수 있게 됐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어찌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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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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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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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저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전시를 봤었는데..인물에 대해서는 깊이있게 알 수 있던 전시는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ㅎㅎ리뷰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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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SAE
    • 다른 분들은 리뷰를 어떻게 쓰셨나하고 봤는데,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들을 쓰셨네요. 많이 도움 받고 가요. 훌륭한 후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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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달곰
    • 저 역시 그런 부분이 조금 아쉬웠는데 공감하는 분이 있다니 반갑네요! ㅎㅎ 항상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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