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살리에리지만 살리에리를 사랑할 것. 그리고 모차르트를 사랑할 것.

글 입력 2016.12.1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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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천재이자 클래식의 대가라 불리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세계 음악사에서 그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명곡들을 남겼던 그에겐 유명한 라이벌 한 명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살리에리. 1984년 개봉한 영화 <아마데우스>는 바로 하늘이 내려준 천재 모차르트와 한 때 모차르트 독살설의 주인공이었던 살리에리, 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Amadeus_02.jpg

 
 한 노인은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며 자살을 시도하다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그곳을 찾은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다. 과거 비엔나 왕실의 궁정음악가였던 살리에리는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소문을 듣고 그의 천재성을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방탕하고 오만한 행동에 충격을 받은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겐 음악적 천재성이, 자신에겐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만이 주어진 것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휩싸인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한 정신적 불안감에 시달리던 모차르트에게 살리에리는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곡인 진혼곡, 레퀴엠 작곡을 의뢰하고 이로 인해 모차르트는 죽음에 이른다.  


 물론 영화 <아마데우스>는 실화가 아닌 픽션이다. 모차르트의 죽음은 질병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질투를 할 만큼 부족하지 않은 인물이었고 오히려 모차르트는 그 괴팍함과 오만함 때문에 많은 이들의 미움을 샀다는 것이다. 
 

 “나는 평범한 이들의 대변인이고 챔피언이며 후원자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살리에리가 신부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이 대사는 어떤 수많은 말과 행동들보다도 살리에리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천재에 대한 질투심, 열등감, 그를 처치했다는데서 오는 찝찝한 희열같은 것들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이 대사를 통해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단연 열등감이라는 굵직한 감정의 덩어리였다.




 
 처음 열등감을 느껴봤던 건 1년 정도 전의 일이다. 그 전까진 열등감이란 걸 알지 못했다. 형편이 좋지 못해 사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음에도 중고등학교 내내 나름대로 높은 성적을 유지했고 온전히 최선을 다해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특출 나게 잘났던 것은 아니었다. 전교 1등이었던 것도, 모든 과목에서 1등급을 받았던 것도 아니었으며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예쁜 얼굴도 아니었고 이성친구들에게 인기도 없었고, 역사나 시사상식이 부족했고 소심한 성격 탓에 발표나 리더십이 필요한 일들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모든 부족함들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열등했지만, 열등감을 몰랐던 시기였다.


shadow2.jpg▲ -구글 이미지 발췌

 
 그러다 대학에 와서부터는 무슨 이유에선지 열등감은 줄곧 그림자가 되어 나를 쫓아다녔다. 대학은 성적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사람을 바라보던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여러 잣대와 그 잣대로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능력과 재능의 홍수 속에서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무색무취의 평범한 나는 점점 위축되어 갔다. 왜 저 친구처럼 될 수 없을까. 왜 나는 타고나지 못했을까. 심지어는 집안 형편에 까지 죄를 뒤집어 씌웠다. 그것만큼 부질없는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잘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지만 어느 것 하나 쉽게 문턱을 내어주지 않았다. 나는 너무 평범했고 형편은 평범하지도 못했다. 

 괴로웠다. 열등감 때문에 무엇을 하든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었다. 영어 공부를 하면서도 해봤자 외국에 살다 온 사람만큼 하지 못할 텐데 뭐하나 싶었다. 잘 시간 놀 시간 쪼개가며 알바하고 장학금 모아서 여행준비를 하는 내 곁에서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교환학생도 여행도 돈 걱정 없이 떠나는 친구를 보며 부러워해야하는 신세가 서러웠다.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그걸로 위로 삼는 일은 그들을 모욕 하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R-V4vAE9Oem6K-THW0YUGZ_UlKE.jpg▲ -구글 이미지 발췌

 
 열등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을 그렇게 명명할 수밖에 없다는데 자존심이 상했고 열등감을 느끼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처음엔 남들보다 뒤처지는 부분을 발전시키는 것이 방법이라 생각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열등감은 더 나아지고자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무리 영어 공부를 하고 돈을 모아도 되려 자괴감만 남았다. 고민 또 고민 끝에 얻어낸 답은 중고등학생 시절의 내게 있었다.

 대단할 게 하나도 없었는데도, 지금보다 어쩌면 더욱 부족했음에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 바로 남과 비교하지 않아서였다. 타고나길 머리가 좋아 매일 잠만 자도 나보다 성적이 좋았던 친구가 있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외모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예쁜 친구와 나를 비교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부모님이 주신 얼굴을 있는 그대로 가꾸며 사는 게 마음에 들었다.
 
 살리에리는 평범한 이들의 대변인이라 했으나 그건 사실 어찌 보면 일종의 망언이다. 그는 이곳을 정복하면 모두를 정복하는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클래식이 융성했던 도시 빈의 궁정 음악가였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꿈에 그리는 자리였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그는 롤모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건 살리에리가 자신을 모차르트와 비교했던 그 순간부터 빛을 잃었다.


 올려다보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네가 하는 일을 네가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엄마가 내게 해준 말이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채 남의 뒤꽁무니나 쫓다 보면 나를 볼 수 없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가 알지 못하는데 누가 알아볼 수 있을까. 불행의 원인은 나보다 잘난 친구들이 아닌 영어 공부를 하고 알바를 해서 여행경비를 모았던 나의 노력을 폄하한 채 남과 비교하기 바빴던 내게 있었던 것이다.

 모차르트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질투와 열등감으로 그를 파멸시켰던 살리에리는 그 열등감이 채운 족쇄에 묶여 32년을 고통에 살아야했다고 고백한다. 결국 열등감은 그 누구도 아닌 살리에리 자신을 갉아먹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으니 누구나 열등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살리에리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던 열등감으로 인한 모든 것들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였던 것이다. 위를 볼 것인가 아니면 오롯이 나를 볼 것인가 하는. 살리에리를 평범하고 못난 사람으로 만들었던 건 모차르트라기보다는 살리에리 자신이었다.

 
제목 없음.jpg▲ -영화 <아마데우스> 중, 신에 대한 분노로 살리에리가 십자가를 불태우는 장면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천재성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한다. 끊임없이 노력해온 자신이 아닌 방탕하고 예의 없는 그에게 그런 천부적인 재능을 주다니 신이 있다면 그럴 리 없다고 절규한다. 그 절규는 한 때 내가 했던 절규였으며 열등감을 느끼는 모든 이들의 절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차르트에겐 어떤 고난과 시련, 노력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 본래 속사정을 꺼내놓지 않는 한 친구로부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무엇이든 나보다 훨씬 쉽게 얻는다는 생각에 괜히 툴툴댔던 친구였다. 부모님의 사업이 순탄치 않아 좁디좁은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 얘기였다. 다행히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 땐 정말 힘들었다고. 그 날 밤은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에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모차르트는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살려 최선을 다해 작곡에 매진했다.  그 결과 오페라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경제적인 궁핍함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질병으로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movie_image.jpg▲ -영화 <아마데우스> 중

 
 물론 친구의 어려운 집안 형편을 일으킨 사람은 친구의 부모님이고 그 친구가 지금 받고 있는 금전적인 지원이 부모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만 내가 그토록 미안했던 이유는 오만함 때문이었다. 나는 단지 내가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질투하고 열등감을 느꼈던 모든 이들의 능력이나 재능을 어떤 노력도 없이 쉽게 얻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던 것이다. 잠도 안 자고 쉬지도 않고 공부해서 얻은 성적을 두고 머리가 좋아서 부럽다고 했던 친구들의 말에는 묘한 불쾌감을 느꼈으면서도 말이다. 열등감, 그 이면엔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속사정에 대한 은근한 오만함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천재라 한들 그 재능을 썩히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영화 속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을 질투하는데 눈이 멀어 생활고 속에서도 끊임없이 음악을 탐구했던 그의 노력은 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의 가난을 이용해 레퀴엠을 작곡하도록 하고 끝내 죽음까지 끌고 갔다. 그건 궁핍함 속에서도 음악을 놓지 않았던 모차르트의 ‘노력’에 대한 살리에리의 ‘오만함’이 낳은 결과였다.




 
 3시간의 긴 러닝타임 동안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생애라기보다는 살리에리의 시선에서 그의 내면을 묘사하는데 더욱 집중하고 있다. 때문에 관객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질투심과 열등감, 그것이 분노로 이어져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 과정을 살리에리를 통해 세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보면 그 시선은 나에게로 돌아와 나를 잠식시키고 있는 열등감을 향한다. ‘살리에리가 될 것인가?’ 영화 <아마데우스>는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물론 난 살리에리와 다르지 않다. 그가 이야기했듯이 살리에리는 평범한 자들의 대변인이고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범하고 부족하더라도 열등감에 빠져 자멸하고 싶진 않다. 살리에리지만 살리에리를 사랑할 것. 그리고 동시에 모차르트를 사랑할 것. 그게 이 영화에 대한 오랜 시간 끝에 내린 나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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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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