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 건축학개론 >,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집을 늘 새로이 두드리네 [시각예술]

글 입력 2016.12.04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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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첫사랑이라는 말은 내게 '고전'같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 같은 의미보다는 내게 첫사랑이란 것은 아주 가까이 있는데 아주 먼 존재 같은 것이다. 아주 영향력이 있지만 어떻게 영향력이 있는지는 잘 모른다. 흔히 고전하면 떠오르는 그 유명한 인물들, 마키아벨리니 애덤 스미스니, 그리고 그들의 유명한 저작, 국부론이니 자본론이니 하는 것들을 아주 유명한 구절만 알고 사실은 부끄럽게도 잘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신기하다. 다른 사람들이 아주 명확하게 내 첫사랑은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걸 보면 신기하다. 나는 아직 첫사랑이 무엇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다. 그래도 조급해지지는 않으려 한다. 시간이 과거의 나를 모아모아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이, 미래의 나에게 명확한 첫사랑도 만들어주리라는 약간의 기대감만 가지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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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학개론>은 그렇게 뭣이 첫사랑인지도 헤매고 다닌 나에게 대문짝만한 돌직구 한 마디를 쏘아올렸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내가, 당신이, 우리가, 누군가에게! 세상에. 어쩌면 나는 이미 나도 모르게 첫사랑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둔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었을 수도 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거창한 의미와 환상을 부여해서 그 밝은 등잔 밑에 숨겨 두었을 수도 있다. 

  내게는 원두커피 같다. 소주 같기도 하다. 영화 <건축학개론>도, 그 안에 담긴 첫사랑이란 것도. 그 이름에 혹해서. 수많은 문학작품과 만화, 드라마, 책이 키워준 꿈에 빠져있었다. 커피도 술도 아주 맛있으려니, 첫눈에 반하려니 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더 실망했고 더 별로였다. 그래서 한번 먹고 먹지 않을 줄 알았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놀랍게도 그쪽이 변한게 아니라 내가 변했다. 좋아하게 된 것이다. 커피는 향기는 감미롭게 퍼지는데 맛은 쌉싸름하다, 술은 웬걸, 무슨 이런 알코올 덩어리라 맛없다고 하다가 어느 날은 안 쓰고, 무려 달기도 하다. 둘다 이따금 그리워진다. 들어있는 카페인, 알코올이라는 친구 때문에 때로는 나를 잠 못이루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한다. 그러다 지친 나를 은근하게 일깨워줘서 은연중에 끊지는 못하고 계속 마시게 되었다.  놀라지도, 놀리지도 마시라. 아직 나는 사랑 앞에서도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그 누구보다도 의기양양할 수가 없다. 초짜 신입이라서 고작 할 수 있는게 비유뿐이다. 그나마 이제 사랑노래가 가끔 공감되고 공감되지 않으면 머리 속으로 좀 그려지는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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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엔 세번째쯤 보고 쓰는 이야기니까 말이지만, 처음엔 승민이가 참 찌질하고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서연이 입장을 이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 본 승민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할 수는 없었다. 방법은 서툴러도 진심인 건 맞으니까. 승민이는 참 있을 법하다. 말은 못하고 끙끙 속앓이를 하고 운다. 서연이 말 한마디에 시무룩해졌다가 웃고 춤도 춘다. 더 잘난 선배 앞에서 쭈굴쭈굴해져서 괜히 화풀이를 엄마한테 하고, 대문짝에다 하고, 택시 아저씨한테 한다. (왜 그 기운을 한방에 모아서 고백은 할 수가 없는지!) 친구에게 자기 친구 얘기라면서 고민을 털어놓는다.

  사실 나는 여전히 그의 마음이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비겁했다. 고백하려고 하루종일 기다리고 마음의 준비를 했던 날, 술에 취해 선배에게 이끌려 들어가던 서연이를 보고 고백을 못한 건 이해할 수가 있었다. 타이밍이 별로였다. 술 먹기 전에 전화라도 되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런데 승민이는 술취했다고 이리 저리 들이대는 그 선배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해보고, 괜히 문 앞에서 귀를 기울여보았다. 다 제쳐두고 그 때 차마 목소리가 안 나와서,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했더라도 아니 왜 그는 좋아하는 서연에게 매몰차게 꺼져달라고 밖에 할 수 없었던 걸까. 무슨 일이 있었으면 어쨌을 거고 아니었으면 어쨌을건데. 멋대로 시작하고, 상상하고 멋대로 끝내고. 한번쯤은 그냥 톡 까놓고 얘기해봐도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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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 비하면 서연이는 그래도 할 만큼 했지 싶었다. 원래 적극적인 성격이긴 한 것 같다. 모르는데 같은 수업이니까 과제를 같이 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러다 어느새 서로 많이 가까워졌을 땐, 그 때도 늘 먼저였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연락을 잔뜩 남겼고. 연락을 받지 않으면 직접 찾아왔고. 첫눈 얘기가 나왔을 때 승민이가 빙글빙글 돌리던 말대신 먼저 만나자고 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듣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쯤 되면 레드 카펫을 깔아준 건데 승민이가 옆 길로 샌거다. 승민이랑 서연이, 이미 썸은 탈 거 다 타고 둘이 왜 이렇게 엇갈린건지 싶었다. 아유 답답해!

  근데 그래서 맞는 거다. 그래서 첫사랑이다. 남의 눈엔 다 보이는 게 당사자는 보이지가 않는 것이었다. 설레고 이상적이어서 첫사랑인게 아니라 현실적인 아픔과 씁쓸함도 함께 담겨서 맞는 거였다. 그렇게 툭 털어놓고 진심을 확인하지는 못하고 조각조각만 본 탓에, 정 떨어질만큼 만나보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어서 그들은 다시 애틋하게 아련하게 궁금증을 품고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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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연이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스무살 처음에도 그녀가 먼저 다가왔듯이, 그 먼 시간과 심리적 거리를 넘어 이번에도 서른다섯살 그녀가 먼저 왔다. 15년전 승민이 먼저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던 그 말 하나만 담보삼아서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먼저 물어보았다. 승민의 첫사랑인 나쁜 여자가 자신인지, 먼저 답했다. 자신의 첫사랑은 승민이라고. 그동안 그녀는 모든 것을 끝내기만 했다. 피아노를 그만두었고, 아나운서 준비를 그만두었고, 남편과의 결혼생활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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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민이는 조금 변했다. 속 시원하게 말 못하던 우물쭈물한 모습대신 말이 많아졌다. 쿨럭거리면서 못 피우던 담배도 잘 피우게 되었다.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도 한다. 찌질한 모습도 솔직하게 찌질하다. 서연이에겐 모든지 예스였던 과거와는 다르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자기를 찾아왔는지, 왜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신에게 집을 부탁하는지 부루퉁해서 궁시렁거린다. 그는 확실하게 서연이를 첫사랑이라는 기억에 가두어두었다. 그녀가 나빴다는 말 한마디로 그 모든 기억을 꽁꽁 싸매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많이 좋아하는 지는 도통 모르겠지만)애인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코 앞에 뒀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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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연이와 승민이가 만나게 되었던 수업 '건축학개론'은 끊임없이 집과 공간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집은 몸만 들어갔다 나오는 딱딱한 건물덩어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체취와 사람다움이 배어있는 또 다른 그 사람이기도 하다. 집은 곧 사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연이가 집을 지어달라는 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또 승민이가 하려던 미완의 '집지어주기 고백'은 그래서 정말 승민이다운 가장 멋진 고백이었다. 그리고 15년 후 찾아와 새출발을 하기 위해 서연의 집을 고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서연의 집은 버릴 건 버리고 남길 건 남기는 방법으로 마무리된다. 아예 새 집으로 싹 다 뜯어고치는게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은 남기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게 자리잡았기 때문에 서연의 아버지가 '이래야 집답다'는 말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대신,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부분부분 달라지고 깊어진 모습에서 새로움을 느낄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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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 만에 완성된 서연의 집짓기는 서연이와 승민이에게 각각 새 출발점이자 새 마침표였다. 승민이는 미처 하지 못하고 어그러지고 만 고백을, 말 못하고 넘겨버린 스무살의 마음에 이제서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서연이 그들의 아지트에 첫눈 오는 날 두고 갔던 CD를 돌려주면서 그 날 만나자던 고백이자 약속에 담겼던 그 마음까지 훌훌 돌려보냈다. 서연은 늘 그만두고 도망쳐온 것들에서 자유로워졌다. 제주도학원 출신이라는 딱지가 싫어 그만두었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고, 무려 그 제주도 학원의 선생님이 되었다. 돈많은 집 사모님이나, 음대 동기들의 핍박이나, 이혼에 대한 시선에서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당신이, 우리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면 우리의 책임감은 정말 크다. 무심코 했던 말이 그 누군가를 승민처럼 울고 웃고 춤추고 욕하게 했을 것이다. 그 누군가에게 좋은 출발점이자 마침표가 될 수 있었던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서연이 같이 스무살엔 수지이고, 서른다섯살엔 한가인인 청순가련한 사람일 자신도 없다. 나를 첫사랑 삼아줄 사람이 이제훈같은 사람인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른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는데 나는 아닌게 확실하다면 비관할 필요도 없다. 여태까지는 가벼웠는데 오히려 이제부터의 책임감이 클 수도 있다. 꼭 처음 만난 사람이 반드시 첫사랑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첫사랑이라는 그 공간, 그 마음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고, 그건 마음에 달린 것이다. 영화가 끝나며 울려 퍼지는 기억의 습작의 가사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당신 혹은 누군가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 영원히 완벽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나처럼 둔하거나 뭘 잘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많다면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내 마음의 집에 들어가 있다는 걸 깨닫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게 모르게, 우리는 계속 새롭게 생겨나고 수정되는 중이다. 누군가의 기억에, 누군가의 집에,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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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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