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과 죽음, 그 기로에 서서, ‘나마스떼, 나마, 스테’ [공연]

당신의 신을 존중합니다
글 입력 2016.11.3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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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마스떼.

  당신은 이 단어를 그저 인사말 정도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그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고 받는 인사말에 어떠한 뜻이 있을거라고 깊이 생각해 본 적이 드물 것이다. 가볍게 툭 던지는 듯한 인사말의 제목 덕분에 나는 이 극을 꽤나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 극의 시놉시스를 접했을 때의 나는 ‘아, 어렵네’하고 생각했었고 극을 보고 난 뒤에는 처음 접하는 충격에 휩싸여 매서운 바람 사이를 지났다.죽음을 결심하는 사람들만큼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류라 생각했다.
  다음은 <나마스떼, 나마, 스테>의 연출의도이다.



죽음을 결심하는 사람들만큼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류라 생각했다.
"'살아있음'은 감히 '죽음'의 가치와 대등할 수 없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살지."라고 단정지었다.
항상 입으로 '너'와 '나'는 '틀린것'이 아닌 '다를뿐'이라고 말하면서
제대로 타인을 이해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너의 죽음과 나의 삶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누군가에게 '죽음'은 고통의 끝,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죽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살아갈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죽음의 문턱에 서있는 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자' 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한번도 죽음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던 이 작품을 접하고 생각한 점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네팔에서는 모든 것들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때문에 서로를 만나면 두 손을 모아 이렇게 인사한다. “나마스떼, 당신의 신을 존중합니다.”

  극은 은해화가 네팔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은해화는 설렘으로 가슴 떨리는 일이 오랜만이라고 이야기한다. 극의 초반에는 무엇 때문에 은해화가 네팔로 떠나는지 알 길 없이 적막하고 잔잔하게 흘러간다.

  이어서 극은 공단비의 일상을 보여주는데, 그녀의 생활을 보고 있으면 누구든지 인생에 의욕이라곤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방 안에는 모아둔 재활용품들이 가득, 컵라면으로 매 끼니를 때우고, 생활용품도 모두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그녀는 자살 사이트에서 사람들의 소재를 구해 그림을 그리려는 작가인데, 자살을 결심하는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는 정말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말로만 그런다며 비웃는다. 이런 공단비를 두고 자살 사이트의 ‘시발인생’은 비겁하다고 이야기한다. 살아갈 이유가 없는데도 그냥 살아있어서 사는 것은 죽지 못하는 것일까? 죽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끝낼 용기가 없는 것일까? ‘시발인생’이 공단비에게 한 그 말은 관객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한편 은해화는 네팔의 강가에서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치루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녀는 혼란스러워 하고, 머리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음악소리가 크게 맴돈다. 죽음을 결심한 사람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확인했을 때 느끼는 충격, 사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모호한 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폭풍치듯 몰아오는 혼란. 그녀는 “산 사람은 무엇이고 죽은 사람은 무엇인가요?‘하고 소리친다. 그것이 그녀가 발견한 모든 것들은 접한 후에 그녀의 머릿 속에 남아있는 유일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네팔에서도 도저히 평화로울 수 없는 은해화와 공단비는 계속해서 채팅을 이어나가는데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은 공단비가 은해화에게 ‘죽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죽어’라고 말한 것이 은해화에게는 상당한 위로가 되었다는 점이다. 나 또한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잘못 이해하고 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은 그들이 다시 살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들이 바라던 말은 그들의 죽음이 도피가 아님을 인정해주는 말이었던 것이다. 죽음은 살아갈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삶에서 마지막으로 찾는 의미라는 것을 이해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극에서 보여진 공단비는 오늘은 웃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매일매일 무의미하게 반복하였기 때문에 매일매일 그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뀌는 것을 보았고, 때문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죽을 이유가 없어서 죽지 못하는 사람이며, 자식을 놓아줄 시기가 아닌데 자식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던 은해화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서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은해화는 공단비에게 그러한 너나 나나 같다고 이야기한다. 공단비는 자살을 앞둔 은해화에게 “나의 신을 당신에게 보낼게요. 나의 신이 당신에게 축복을 내리기를, 제발, 나마스떼!‘하고 외친다. 공단비의 신이 은해화에게 닿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해화는 죽으려던 그 순간 지진을 맞이하고 그 틈에서도 살아남는다. 은해화는 잔해 속에서, 1루피에 기뻐하던 어린 소녀의 눈에서,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진실한 눈을 바라보게 된다. 그 또한 은해화에게는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이해가 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문제에서도 단지 "이해한다"는 사실은 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살아갈 ‘희망’이 된다.
  
  이 극을 통해 우리는 죽음의 의미가 각자에게 굉장히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간단한 것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또 그 간단한 것을 잊고 살아갈 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간단하지만 중요한 것들은 늘 행동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극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2인극이었으며, 나는 2명이라는 숫자에서 소통이 시작되는 그 시작을 보고 싶었고 <나마스떼, 나마, 스테>는 그러한 나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켜준 작품이었다. 이해와 소통의 시작으로 우리는 어쩌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까지 구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나의 신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축복을 내리기를, 나마스떼, 나마, 스테.


[정다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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