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저녁만큼은 생의 끝까지 그 아이의 것이기를

글 입력 2016.11.2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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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을 위하여  

나희덕

“엄마, 천천히 가요.”
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칭얼거린다.
그 팔을 끌어당기면서
아침부터 나는 아이에게 저녁을 가르친다.
기다림을, 참으라는 것을 가르친다.
“자, 착하지? 조금만 가면 돼.
이따 저녁에 만나려면 가서 잘 놀아야지“
마음이 급한 내 팔에 끌려올 때마다
아이의 팔이 조금씩 늘어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남에게 맡겨야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들에 더욱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모질게도 가르치려는 것일까.
해종일 잘 견디어야 저녁이 온다고,
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서야
이부자리에 팔과 다리를 석을 수 있다고
모든 아침은 우리에게 말한다.
오늘은 저도 발꿈치가 아픈지
막무가내로 울면서 절름거린다.
“자, 착하지?”
아이의 눈가를 훔쳐주다가
나는 문득 이 눈부신 햇살을 버리고 싶다.





1428155766_IMG_0303.JPG▲ -구글 이미지 발췌

 
 즐거움이라는 건 때로는 거대한 태풍과 같은 모습으로, 때로는 수줍게 고개 내민 꽃망울과 같은 모습으로 온다. 몇 일전, 1년 만에 가까운 대학 동기들과 파전에 막걸리를 곁들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이 내겐 최근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여행에 관한 추억도 유명한 문화유산이나 대단한 자연 풍광이 아닌 숙소 창턱에 앉아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국땅의 낯선 골목길을 바라봤던 일이다. 그런 작디작은 일들에서 즐거움을 찾는 게 운명인 냥, 하루하루를 그러한 즐거움에 설레며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의 일상이며 나의 여행이었다. 이렇듯 내게 즐거움이란 많은 경우에 꽃망울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다. 또한 그 꽃망울들은 내가 이제껏 살아왔던 힘인 동시에 앞으로 살아나갈 힘의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러한 소박한 즐거움에 너무나 야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추운 것, 그리고 어두운 것. 이 두 가지는 항상 나를 두렵게 한다. 예쁜 옷 따위는 가차 없이 포기하고 겨울만 되면 무조건 껴입는 것도, 잠들기 직전까지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내게 밤이라는 시간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도 없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가 있는데, 집이라는 공간이 그렇다. 


getty_rf_photo_of_woman_looking_through_window.jpg▲ -구글 이미지 발췌
 

 대학을 서울로 오고 난 뒤엔 한 달에 한 번 정도 고향 집에 내려간다. 하지만 독립과는 거리가 먼 두 자식때문에 부모님이 새벽같이 집을 나서고 난 뒤 느지막하게 눈을 뜨면 서울에서와 다를 바 없이 혼자가 된다. 밥도 혼자 먹고 티비 프로그램도 혼자 보고. 이럴 때 가장 큰 문제는 햇빛이다. 해님의 인사로 아침을 시작하고 해님의 인사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집에 있다 보면 내내 햇살을 맞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괴롭다. 하루 왠종일 시달리고 나면 해님은 떠나가고, 다른 것이 찾아온다. 바로 수 백 번은 들어온 발자국 소리. 세상에서 제일 호쾌한 우리 가족들의 웃음소리. 이들이 버무려져 복도를 칠하며 스멀스멀 현관문 틈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스며든 밤은, 그 밤의 집은 아무리 어둡고 추울지라도 두려움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차분하고 포근하게 어떤 고민도 없이 즐거워진다. 

 이렇듯 소박한 것들. 그 중에서도 기본 중의 기본이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 밤이 아닐까. 그것은 우리가 즐거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때부터 직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또한 인간 태초의 즐거움이며, 필수불가결한 즐거움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서는 이러한 최소한의 즐거움조차 희생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다. 그뿐이랴, 심지어는 그것을 바라는 것조차도 ‘사치’가 되어버렸다.


 나희덕의 시 <저녁을 위하여> 속 어머니는 아이에게 저녁을 가르치는 일이, 저녁이 되어야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 잔인하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 역시 안타깝긴 했으나 나로서는 시의 뒷얘기가, 훗날 ‘저녁’조차도 포기해야할 아이의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슬펐다. 
 
 어린아이부터 중고등학생, 대학생에 이어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에겐 저녁이 없다. 중학생은 고등학교 때 배울 학업을 선행하면서, 고등학생은 대학입학을 위한 수능 공부를 하면서, 대학생은 직장인이 되기 위해 필요치 않은 스펙들을 쌓으면서, 직장인은 밤마다 야근을 하면서 어둠을 쓸쓸히 지새운다. 무서운 건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야자 혹은 야근을 하지 않으면 사회 부적응자,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사회에서 저녁은, 밤은 더 이상 누구의 것도 아니다.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꿈에 조금이라도 더 가 닿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멋있는 일이고 본받을 만하다. 하지만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 중 정말 그들이 ‘원해서’ 가족들과 저녁 한 끼 먹을 여유도 없이 바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따듯한 이불에 들어앉아 사랑하는 이와 하루를 이야기할 정신도 없이 쓰러져 잠드는 매일이 정상일까? 


 일상이 무너진다. 즐거움을 잃는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남에게 맡겨야만 하고, 아이를 저녁에만 키울 수 있는 불구적인 현실. 앞으로의 삶에 끊임없이 대비하기 위해 지금의 삶을 갉아먹는 모순이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이 오늘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일상이 무너지고 우리가 삶에서 누려야 마땅한 소소한 재미들, 그 온기들을 잃는다면 그게 과연 사는 것일지. 그런 이들로 가득한 사회는 정말 건강할지 의문스럽다.


m0020076_still_04w636-_83mikong.jpg▲ -구글 이미지 발췌

 
 조금의 여유가 주어지길 바란다. 최소한 하루 중 반의 반나절만큼이라도 가족 혹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당연해지길 바란다. 세상천지에 어둠이 켜켜이 쌓여갈 때 내 집 하나만이라도 온기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삶이 소박한 즐거움들로, 꽃망울들로 가득하기를 바란다. 그래도 저녁만큼은 생의 끝까지 그 아이의 것이기를 말이다. 




반채은.jpg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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