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시대, 현대 소설이 지닌 힘에 관하여 [문학]

글 입력 2016.11.26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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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현실의 현실’이 만나는 공간 ― 소설


문학의 무용론이 대두되는 시대이다. 이 복잡한 시국에 과연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무엇보다도 소설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재밌다는 우스개소리를 하며 소설이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일수록 소설은 더욱 힘을 가질 수 있다. 현대소설은 고전소설과 달리 환상성이 배제된 현실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사회의 어두운(추한) 면을 조명하고, 독자와 현실이 조우하는 공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Ⅰ. '근현대’ 소설의 정의

  한국 근현대 소설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어디서부터를 근현대 소설이라고 부를 것인지, 그리고 그 소설들을 관통하고 있는 공통된 요소는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은 1894년 갑오개혁이다. 혁신 내각은 갑오개혁을 통해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서 봉건제도를 청산하고 근대화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이 근대화는 ‘외부에 위치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국가 권력에 의한 진행이었다. 따라서 힘의 균형에 있어 언제나 열세에 놓여 국가권력과 대립하는 미약한 저항세력이 존재하였다. 그들 또한 근대적인 사회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정책과 현실의 괴리로 인한 모순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저항세력들―근대적 주체들―은 이러한 혼란으로 이루어진 삶의 경험을 답파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형성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근현대 시기의 혼란은 문학에도 그대로 투영되어있다. 계몽개화시대 이후 한국문학은, 이전의 고전 소설과는 달리 현실적 상상력을 소설에 풀어낸다. 고전소설에서는 신화적이고 설화적인 세계가 중심을 이루지만, 계몽개화시대의 문학은 이러한 환상의 세계가 소멸된 자리에 일상의 현실 공간이 들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근현대 서사에서의 주인공은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신에 의존하지도 않으며, 운에 자신을 맡기지도 않는다. 근대 시기 인간에게는 ‘현실의 삶과 그 운명이라는 것이 비로소 자신의 몫’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과 닮은 현실적인 주인공을 마주한다. 그리고 작중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소설 내부의 배경, 즉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현대 소설은 현실적인 문제나 사회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여, 독자로 하여금 자신과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닌 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Ⅱ. 본론: 근현대 소설이 현실을 묘사하는 방식

  이처럼 사회의 군상을 그대로 담아내는 근현대 소설은, 현실을 그려내는 방식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현실의 추한 얼굴을 극대화하여 독자에게 일종의 충격을 주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현실을 극적으로 묘사하거나 과장하지 않은 채, 일상을 무덤덤하게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첫 번째 방식으로 쓰인 소설로는 강경애의 『지하촌』과 편혜영의 『아오이가든』을, 두 번째 방식으로 현실을 그려낸 소설은 최명익의 『비오는 길』과 『심문』을 예로 들어 근현대 소설의 특징을 구체화할 수 있다.


1. 추(醜)와의 대면

  현실의 추악함을 전면에 내세운 대표적인 근대 소설이 강경애의 『지하촌』이다. 네 살에 경풍을 앓았지만, 의사가 치료를 해주지 않았던 탓에 장애를 얻은 칠성과 눈이 보이지 않는 큰년이가 주된 인물이다. 두 인물의 공통점은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궁핍한 식민지 현실로부터 강요된 ‘불구’는, 일부 사람들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상적 생활이었다.
 따라서 일본에 의해 지배당하는 현실을 작가가 은유할 때에, 무의식적으로 ‘불구자’의 상태라고 은유한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 조선의 추하고 불구적인 현실은 소설에서 가감 없이 묘사된다.


애기는 작고 그 가는 손까락으로 머리를 쥐어다리고 종기 딱지를 떼어 오물오물 먹고 잇다. 

그는 술을 뎅긍 내치고 애기를 번쩍 들어 문박으로 내놋앗다. 그리고 뼈만 남은 애기의 볼기를 짝 붓치니 얼골이 새캄해지면서도 여전히 윽윽 겨운다

칠운이는 마츰내 응응 울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뒤문 박으로 나가더니 오줌을 내뻗치우며 그 오줌을 눈에 바른다. 


  『지하촌』은 인물의 극단적 상황을 묘사함에 있어서 거침이 없다. 따라서 독자들은 소설을 읽으며 충격적일만큼 큰 불쾌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내 그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당대 사회에 만연했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 때에 소설은 기능하기 시작한다. ‘소설이 보여주는 현실 의식을 낯선 충격으로 탁월하게 묘사하‘여, 독자로 하여금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 소설의 역할인 것이다.
  이 소설은 칠성 여동생의 머리에 붙여두었던 쥐 가죽에서 구데기가 떨어지며 아기가 정신을 잃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 장면을 목도한 칠성은 아기에게 다가가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 하늘만 노려본다. 현실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칠성의 분노한 눈빛을, 독자는 소설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추악한 현실을 독자가 목도하게끔 만드는 소설은 현대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편혜영의 『아오이가든』이 그 중 하나이다. 이 소설에서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가 훼손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맨홀」에서는 버려진 아이들이 모여 사는 어둡고 축축한 맨홀이 배경으로 설정된다. 이 공간은 근대화되고 문명화된 도시의 지하에 위치해있다. 이는 문명화의 어두운 면을 은유한다. 맨홀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쥐처럼 모여 쓰레기를 뒤지고, 눈에 진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후반부에는 임신 중이었던 ‘C’가 맨홀 외부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켜 체포되고 만다. 그리고 그녀는 ‘과학관’에서 해부되어 박제되고, 뱃속에 있던 아기는 포르말린에 담기게 된다.


나는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 해부대를 쳐다보았다. 심장과 간, 허파와 꼬불거리는 내장들이 길게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 그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니 꼭 내 얼굴 같았다. 벽에 박혀 불타고 있는 C는 눈동자가 빠진 하얀 눈으로 내가 흘린 내장들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독자는 글을 읽는 내내, 역겨운 냄새가 나는 과학관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문명화 되었으며 과학적 발전이 눈부시게 이루어진 곳을 배경으로 해부된 인간을 상세하게 묘사한 이 소설이, 독자로 하여금 현실의 어두운 면과 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실의 추(醜)한 면을 전면에 내세운 글은, 그로 인해 파괴된 인간의 모습을 낱낱이 ‘해부’한다. 그리고 독자가 인식하는 ‘현실’의 개념에 파동을 일으켜 비로소 사회의 본질을 바라보도록 만들어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2. 일상 묘사의 비일상성

  첫 번째 방식과는 달리, 현실을 무덤덤하게 묘사하는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최명익의 단편들이 이에 해당한다. 「비 오는 길」과 「심문」에는 모두 누군가의 ‘죽음’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죽음의 비극성은 상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을 목격하는 인물들의 심경 또한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그려진다.


한 점의 티나 가는 한 줄기 주름살도 없는 여옥의 인당을 들여다보면서 죽은 내 처 혜숙이의 그것을 다시 보는 듯이 반갑기도 하였다. (…) 이렇게 죽어가는 것이 여옥이의 여옥이다운 운명이라고도 생각하였다. 

병일이는 지금껏 자기 앞에서 이야기를 하여 들려주던 사람이 하던 이야기를 마치지 않고 슬쩍 나가버린 듯이 허전함을 느꼈다. (…) 노방의 타인은 언제까지나 노방의 타인이기를 바랐다. 


  ‘여옥’의 자살을 목도한 ‘명일’과, 나름 친하게 지내던 사진사 ‘이칠성’의 죽음을 알게 된 ‘병일’ 모두,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한 사람이라기에는 감정이 지나치게 결여되어있다. 도리어 명일은 여옥의 시체가 ‘반갑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병일’ 또한 사진사의 죽음으로 인해 그저 ‘허전함’ 정도를 느끼며, ‘산 사람은 아무렇게라도 죽을 때까지는 살 수 있는 것이니까’라고 생각한다. 마치 그들은 ‘무성격자’인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매우 무감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인칭 시점을 통해 서술되는 이 소설들은, 현실의 묘사나 이야기의 서사적 추이보다 화자의 자의식 표현에 더 집중하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극심한 슬픔이나 고난을 예상했던 독자들은, 이러한 화자의 속마음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왜 이렇게 담담한가. 죽음 앞에서 어떻게 이러한 냉소적인 태도를 지닐 수 있는가. ‘죽음’을 대하는 명일과 병일의 일상적인 태도를 독자는 ‘비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구심은 독자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될 수 있다. 「비 오는 길」과 「심문」은 모두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쓰였다. 이 때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적 통제 하에서 점점 무기력해지는 지식인들의 모습이 소설에 투영되어 있다. 의미 있는 삶을 살며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여옥’의 죽음 앞에서조차 방관적이고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는 명일이 그러하다. 또한 근대 자본의 논리가 도입되던 당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지식인 ‘병일’의 모습이 그러하다. 잔뜩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두 인물들의 무덤덤한 심리 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된다. 과연 무기력하고 무덤덤한 사람은 이들 뿐인가? 라고 말이다. 



Ⅲ. 현실의 현실

  지금까지 근현대 소설이 현실적인 배경을 어떤 방식으로 작중에 끌어오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나는 현실의 추악한 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독자로 하여금 현실 인식을 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이고 파격적인 묘사 없이도, 독자가 스스로 현실 상황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답을 하는 방식이다.
  두 가지 방법 모두, 결론은 독자가 사회의 본질을 바라보게 된다는 점에 있다. 독자는 근현대 소설을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인식하고, 현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은, ‘현실의 현실’과 ‘나’를 서로 마주보도록 하는 힘을 지녔다.


[이영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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