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너도 고양이를 죽였지? 연극 싸이코패스는 고양이를 죽인다

글 입력 2016.11.1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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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싸이코패스는 고양이를 죽인다에서는 수많은, 정말 수많은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진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진다. 바로 ‘고양이는 누가 죽였을까’라는 질문이다. 연극은 누가 고양이를 죽였는지를 추궁하면서부터 시작해서, 우리에게 누가 고양이를 죽였는지를 물으며 끝난다. 그래서 나 또한 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묻고자 한다. 누가 고양이를 죽였을까? 함께 고민해보자.
 
연극 속 사람들이 모인 계기는 고양이 살해범을 잡기 위해서다. 고양이라는, 굉장히 보편적이고 어떤 의미로 보자면 별거 아닌 일로 이들은 모인다. 하지만 고양이 살해의 이미지는 곧 옆동네 여대생 살인사건의 이미지와 연관 된다.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이 두 사건은 근처라는 점과, 누군가 살해했다는 고리만으로 연관 지어진다. 이 과정에선 수많은 논리의 비약이 일어났지만, 이런 저런 ‘카더라’와 ‘말 수가 없고’ ‘험악하게 생긴’‘익명의’ 사람과 결부지어지면서 비약은 그럴듯한 논리를 갖게 된다. 그렇게 갖게 된 단체의 논리는 맹목적인 믿음과 광기를 불러일으킨다.
 
 
“안 본 것 같기도 하고…본 것 같기도 하고!”

 
확증도 없이 ‘그런 것 같더라’하는 것만으로 진행 된 논의. 그렇게 301호 남자는 험악한 인상에 이웃들과 잘 모르는 사이라는 것만으로 이미 ‘살해범’, 즉 ‘싸이코패스’라 단정 지어진다. 밤마다 괴로워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온다거나, 전단지 앞에서 뭘 감추는 걸 봤다거나, 그저 불길한 느낌이 든다거나. 근본은 없는 증언들은 그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간다. 그렇게 한번 단정 지어진 후 남자의 모든 발언과 행동은 ‘싸이코패스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흐름 속 ‘싸이코패스’에 대한 단편적인 속성들은 그들의 믿음을 확신시켜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것은 여자혐오로, 부모님께 혼난 적이 있다는 것은 어릴 적 학대 경혐이 있다는 것으로, 부당한 의심에 화를 내는 것은 반사회적 성향으로.
 
한번 시작 된 의심은 그 의심이 불합리하다는 걸 알려주는 여러 정황들에 대한 사고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신음소리는 허리가 안 좋아서, 전단지를 숨긴 것은 허리를 위해 요가에 다니고 싶어서. 그 의심을 깰만한 정황들이 모두 제시되었음에도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깨지 않는다.
 
이들의 믿음은 비정상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의심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안위를 위해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상인’을 자처하며 ‘비정상’인 ‘싸이코패스’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갖는다. 이 공포는 누군가 나를 죽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보단 ‘비정상’에 대한 공포로 보인다. 어떻게 고양이를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냐며, 어떻게 여대생의 피를 가지고 놀 수 있냐며. 그들은 본인들은 철처하게 ‘일반인’으로 두고 ‘싸이코패스’는 ‘비정상인’으로 타자화 시킨다.

 
“싸이코패스가 아닐 수 있지만…맞을 수도 있잖아요!”

 
결국 그들의 맹목저인 믿음은 아무 죄 없는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살인자를 두려워했던 그들은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 후에서야 그 남자가 ‘싸이코패스’가 아닐 수 있었던 여러 정황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가 싸이코패스가 아닐 수 있다는, 그 정당한 의심은 곧 무너진다. 그가 싸이코패스가 아니라면 자신들은 ‘정당방위’가 아니라 ‘살인’을 저지른 것이 되기에. 자신들이 살인자가 되지 않기위해 그들은 그가 싸이코패스라고 다시금 믿기 시작한다. 아니 믿는 것을 넘어서 그를 싸이코패스로 만들고자 한다.
 
누가 고양이를 죽였는가부터 시작했던 이야기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누가 죽였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301호 남자가 죽인 것’이어야만 했을 뿐. 진실은 어떻든 빌라 사람들에겐 301호 남자가 ‘고양이를 죽였어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301호 남자를 싸이코패스로 둔갑시키는 과정 속에서 ’일반인‘을 자처했던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가장'역할을 하지 못하는 자격지심에 휩싸여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한테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는 남자, 그런 남편에 의한 스트레스를 히스테리 부리는 것으로 푸는 아내. 아이들을 불태우는 상상을 하며 수업을 하는 선생님, 환자가 죽은 후가 가장 평온한 순간이라 느끼는 간병인, 음식 나눔 자원봉사에 나가서 음식에 이상한 것을 타는 할아버지, 한 번도 여자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순결을 최고의 가치라 여기며 나머지 여성을 혐오하는 백수, ‘처녀성’을 가지고 싶어서 안달하는 남자들에 환멸을 느껴 관계를 빌미로 학대하는 아가씨. 대놓고 성희롱을 하는 형사.
 
이들의 모습은 각각이 병리적인 이 사회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특히나 ‘가부장제’, 혹은 ‘여성혐오’적인 모습들이 각 인물을 통해서 잘 드러났다. ‘지켜주겠다’며 당연하게 성희롱을 하는 형사나 ‘가장역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드는 남편의 모습은 남성이 우위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부장제의 병리성을 보여준다. 특히나 처녀성을 숭배해 아가씨가 순결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땐 멸시하다가 ‘처녀’라는 것을 알자마자 태도가 변하는 백수의 역겨운 모습은 ‘일베’등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마초’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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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콧노래 부르잖아.
요즘 세상에 콧노래 부르는 사람이 어딨어?”

 
누구하나도 ‘정상적’이지 않은 이들은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을 자처하며 ‘싸이코패스’를 두려워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런 비정상의 일반화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흐려놓는다. 연극 속 사회에선 이 비정상적인 행태들이 외려 ‘정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를 드러내주듯 자기는 고백할 것이 없다는 302호 남자에게 빌라 주민들은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소리친다. 그리고 남자의 비정상적인 속성으로 ‘콧노래’가 지적된다. 앞서 연극 시작부에서는 좋은 사람의 표상이 되었던 ‘콧노래’는 모두의 민낯이 드러난 순간엔 비정상의 표상이 되었다.
 
301호 남자가 싸이코패스라는 정황이 그럴싸하게 만들어져 갈수록 빌라 주민들의 비정상성도 강화돼 간다. 그들이 ‘비정상’이고 ‘싸이코패스’같다며 두려워했던 모든 행동들은 ‘연기’라는 이름하에 정당화 된다. 남자의 피를 가지고 물감처럼 노는 할아버지나, 요가 포스터에 그려져 있는 여성의 생식기를 찢는 청년, 아가씨의 목에 겨눈 칼을 거두지 못하는 302호 남자. 싸이코패스적인 행태가 심해질수록 그들은 ‘리얼리티’라며 서로 박수를 치고 좋아한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앞서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는 평가를 받았던 행동들이었다. 그를 보면서 박수치고 좋아하는 모습은 그들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싸이코패스’가 두렵다던 이들이었다곤 믿기 힘들 정도다.


“그래서 대신…고양이를 죽인다!”
“고양이 한 마리면 싸게 먹히니까!”

 
이런 모습은 ‘싸이코패스 연극’의 나레이션을 주민이 모두 다 같이 하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싸이코패스라는 인물의 입을 빌리지만 말을 내뱉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엔 진심이 묻어난다. 너무나 화가 나 죽이고 싶지만 사람이 많고, 여기서 참지 못한다면 내 인생은 끝이 날 테니까 ‘그래서 대신’ 고양이를 죽인다는 나레이션은 ‘일반인’이란 탈 아래 감춰져있던 그들의 민낯을 드러내준다. 결국 고양이를 죽여왔던 것은 그 ‘어떤 싸이코패스’가 아니라 그 빌라 주민들이었던 것이다. 고양이를 죽인 이가 싸이코패스라는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그 하나하나는 모두 싸이코패스였던 셈이다.
 
심지어 그들은 ‘연극을 리얼리티하게 만들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을 죽일 작당까지 한다. 고양이를 넘어 사람까지도 ‘작당하고’ 죽일 정도로 그들 스스로가 싸이코패스가 되어가는 것이다. 죽임을 당할 대상은 누구든 상관없다. 방금까지도 함께 작당을 하던 이일지라도 지금 ‘내’게 문제가 없으면 상관없다. 시체가 필요하다는 말에 그들은 서로에게 커터칼을 들이댄다. 결국 이는 ‘우리’라는 결속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산되지만 서로에게 커터칼을 들이대는 장면은 이들이 함께하고 있더라도 결코 서로를 위하진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실은…?”
“고양이가 물어갔죠!”
 
"왜 사람을 죽였나?"
“고양이가 시켰어요.”

 
연극은 계속해서 ‘정상’과 ‘일반’, 그리고 ‘비정상’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싸이코패스를 두려워하던 이들이 사실은 싸이코패스적 기질을 모두 품고 있었다는 아이러니. 연극에선 ‘가장 정상인 같던’, 광기처럼 보이는 그 상황 속 유일하게 ‘정상인 같은 사고’, ‘인륜적인 사고’를 하던 302호 남자가 사실은 진짜 싸이코패스라는 아이러니. 연극은 이를 통해서 현대 사회에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서 고양이 하나쯤은 죽여야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 ‘정상’이란 것은 어쩌면 일종의 가면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즉, 어쩌면 싸이코패스가 가장 일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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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누가 죽였는지를 추궁하기 위해 모인 이들. 모든 사건은 ‘고양이 살해사건’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결국 고양이 살해의 범인은 누구라고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빌라주민 누군가, 혹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죽였을 것이란 예측만 가능할 따름이다. 연극 내에서 해결되지 못한 질문은 
연극 밖의 우리를 향한다.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묻는다. 누가 고양이를 죽였을까?

사실 제목이 답을 말해주고 있다. 싸이코패스다. 그렇다면 싸이코패스는 누구일까?  ‘누가’ 고양이를 죽인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고양이를 죽인다. 즉 '누구라도' 싸이코패스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누구라도’ 안에는 함께 자리하고 있던 우리, 관객도 포함된다. 연극의 마지막. 고양이가 시켰다며 칼을 든 남자는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너네도 고양이를 죽여왔지 않냐는 듯이. 그는 이렇게 묻고있는 듯 했다.


당신도 고양이를 죽였지?


싸이코패스를 두려워하면서도 그 본인들이 싸이코패스였던 그들처럼. 우리를 향하고 있는 남자의 칼날은 연극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면서도 고양이를 죽여왔을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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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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