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주연(主演)을 원하지 않는 주연의 영화 - 한국문학의 '후장사실주의' [문학]

글 입력 2016.11.1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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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장사실주의'. 처음 이 단어를 마주한 사람은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후장사실주의란 신세대 한국 소설가 정지돈, 최근 단편집 ‘의인법’을 낸 오한기, 그리고 단편집 ‘프리즘’을 낸 이상우 등으로 구성된 모임이다. 이 단어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나오는 ‘내장(內裝)사실주의’를 패러디한 것이다. ‘내장사실주의’란 볼라뇨가 주도했던 ‘밑바닥 사실주의’를 패러디한 것이기 때문에, 후장사실주의는 패러디의 패러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 문학의 기존의 흐름을 거부한 소설가 중 한 사람인 이상우의 작품집 <프리즘>에 있는 단편인 '비치'를 읽어보았다. 이는 기존의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캡처.JPG
(출처=문학동네)

  

Ⅰ. 영화처럼
 
이상우의 <비치>는 거침없는 외국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힘들여 읽지 않아도 소설 속 글자들은 이미지와 영상이 되어 눈앞에 떠오른다. 당신은 어느새 커티스와 메이가 탄 차의 뒷좌석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으며, 시신 안치실에 앉아있는 커티스의 곁에서 그의 표정을 살핀다. 커티스가 혼란을 느끼면 당신도 혼란스럽고, 커티스가 꿈을 꾸면 당신도 꿈을 꾼다. <비치>가 글을 설계하고 독자들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방식은 일반적인 소설의 그것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소설은 인물과 배경을 직물처럼 촘촘하게 엮어내어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이상우는 독자가 각각의 장면들을 ‘감각’하게 만든다. 작가가 배치한 미장센들을 따라가기만 해도 독자는 소설을 마치 영화처럼 ‘보게’ 되는 것이다.
 
<비치>를 영화처럼 느껴지게 하는 큰 요소는 인물들의 대화이다. 이들의 대화는 마치 외화의 대사 같다.
   

― 이거 사줘.
메이가 가면을 받아들고선 내게 말했다.
― 오, 메이. 정말 훌륭한 의미인걸.
― 비꼬는 남자는 멋이 없어, 커티스. 
   
― 너 고등학교도 나왔단 말이야?
― 정말 경찰에 신고라도 하고 싶다. 커티스.
   
― 메이.
나는 그녀의 가슴 위에 토사물을 쏟아냈다.
― 씨발, 커티스. 더럽게 무슨 짓이야.
   
― 사실 난 면허가 없어.
메이가 대답했다.
― 이런, 젠장.
둘러보니 우리는 차선 반대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다행히 도로에는 차들이 없었다.
   

메이가 발화하는 많은 문장에서는 ‘나’의 이름인 ‘커티스’가 반복해서 불려진다. 이는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시작할 때에 한정되어 있지만은 않다. 메이와 커티스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녀는 커티스의 이름을 문장의 끝에 덧붙이듯 말한다. 이러한 문장 구사는 한국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아니다.

주인공들이 욕지기를 내뱉는 것 또한 일반적인 구어체와는 거리가 있다. ‘더럽게 무슨 짓이야’라든지 ‘이런, 젠장’이라는 문장들은 다른 언어로 한 번 발화된 욕설을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어딘가 딱딱하고 자연스럽지 않다. 반면 커티스가 한국인과 대화를 나눌 때 문장의 어조는 비교적 생동감이 느껴진다.

메이와 커티스가 외국어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두 사람의 대화를 묘사한 어투가 다소간 낯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뻣뻣한 번역체를 사용하는 것이 <비치>만의 특징은 아니지만, 배경이 이국적인 도시라는 점과 영화 대사의 앞에 붙는 기호인 ‘―’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통해 소설 속 대화가 영화 대사와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점은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공간적 배경이 자주 변화한다는 것이다. 호텔에서 시작하여 식당, 해변가, 가면 가게, 롤러장, 축제장, 그리고 세탁소를 지나 최종 목적지인 시신 안치소로 향하는 플롯을 읽으며 한 편의 여행 영화를 떠올린다. 단순히 ‘이모의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라는 플롯만이 이것을 영화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각각의 공간적 배경에서 커티스가 느끼는 이미지들을 포착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비치> 속 공간은 공간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다. 작가는 주인공이 그 공간 안에서 어떤 이미지를 감각하였는지를 집요하게 포착하여 서술할 뿐이다. 브라질이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쉼 없이 바뀌는 장소들을 좀처럼 묘사하려 들지도 않는다. 인물 또한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커티스는 해변에서 수영을 하지도 않으며 롤러장에서도 롤러를 타지 않은 채 어제의 섹스에 대해 생각한다. 작가는 그가 조수석에서 ‘파도가 엎어지는’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그가 꾸는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의 이러한 특징은 커티스가 이모와 있었던 꽃집에서 느꼈던 감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요약적으로 드러난다.
 
― 계속? 이게 전부야. 나는 그날 이모가 내게 어떤 이야기를 해줬는지, 이모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그 장면이 이모에 대한 단 하나의 기억인데 기억의 모든 초점은 콧물이나 삼키는 내 모습에만 집중되어 있지.
 
독자는 <비치>를 읽는 동안 브라질의 해변이 어땠는지, 그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그의 외모는 어떤지 알 수 없다. 장면의 모든 초점은 마약을 하고선 세탁기 안에 들어가 비가 내린다고 착각하는 커티스의 모습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면서, 커티스라는 주인공만을 끈질기게 쫓는 영화를 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비치>에서의 공간은 커티스가 그 공간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마치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들은 별 영양가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영화처럼 말이다.

 
 
Ⅱ. 커티스라고 불리는 사나이
 
<비치>에서 사용되는 비유들은 즉흥적이고 파괴적이다. 독특한 비유들은 이미지를 끊임없이 불러오면서 소설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페이조아다. 오래된 전통요리라 했는데 돼지 배를 칼로 찢어서 쏟아져 나오는 걸 그대로 그릇에 담아놓은 것 같았다.
   
― 차라리 고양이를 믹서기에 갈아 마시는 게 낫겠어.
   
태양의 고도가 높아져 그림자가 길어지니, 그림자가 사람들을 개처럼 끌고 다니는 것 같아 보였다. 
   
― 그래. 저들은 꼭 축제만 되면 발정난 개처럼 행동하지.
   

작품에서는 동물을 보조관념으로 자주 사용한다. 커티스는 동물들의 배를 가르고 갈아 마시는 것을 떠올리고 발화하는 데에 거침이 없다. 또한 개를 타인의 행위를 비하하는 의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집중해야 할 점은 커티스가 떠올리는 비유적 표현이나 언어들이 긍정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커티스에게 비유의 세계는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슬픈 표정을 짓고 손님들 절을 받아주면 돼. <세서미 스트리트>의 저능아들처럼 말이야. 

― 포르노 버전 <혹성탈출>을 감상하는 기분이야.
   
― 디즈니영화만큼 시시한데.
   
그녀는 뇌에서 박자감각이 제거된 사람처럼 보였지만 혼자 바닥에 구르고 물구나무서는 모습은 귀여운 면이 있었다.
   
세피아톤의 조명이 새어나오는 투명문은 안치소라기보다 차라리 변두리 레스토랑 같아 보였다.
 

이러한 그가 유일하게 미적으로 아름다운 비유를 사용한 것은 그가 현실을 인식하지 않을 때였다. 그는 마리화나보다 ‘좀더 강한’ 마약을 하고 메이와 세탁실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는 이 상황이 ‘마치 솜사탕으로 만들어진 결혼식장에 와 있는 기분’이라고 느낀다. ‘도돌이표 모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 쿠션 천사들이’ 그들의 곁에서 함께 춤을 추고, 세탁기에 달린 동그란 입이 ‘아주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고 생각한다. 마약에 취해 있는 커티스만이 세계를 평온한 용어로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다. 세서미 스트리트, 혹성탈출, 디즈니영화와 같은 허구의 세계를 빌려와 현실 세계를 이야기하는 대목은 그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에게 현실이란 거슬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가 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 축제를 즐기는 외국인들, 심지어 타국 땅에서 죽어버린 이모까지 어느 것 하나 그에게 성가시지 않은 것이 없다. 그는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나아가 공포에 떨기도 한다. 소신과 믿음을 지닌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는 일도 일삼는다.
 

― 무슨 전화야?
― 채식주의 단체야. 자기들이 드디어 녹색 똥을 쌌으니 와서 구경해달래.
   
― 출발은 당신이 하셔야지.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 누구야. 혹시 예수님이세요?
 

그는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폭주한다. 마약을 하고, 창녀를 사고, 술을 마시고, 구토를 하며 심지어는 자신이 이미 죽은 것인지 헷갈려하기도 한다. 그가 무언가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은 반복된다.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메이의 입을 통해서만 재현된다.
 

나는 메이에게 너 창녀야? 라고 물어보려다 창문을 열고 액셀을 밟았다.
 
― 나 어제 꽤 오래 하지 않았어?
내가 물었다.
― 무슨 소리야. 가슴만 만지다가 잠든 주제에.
메이가 대답했다.
― 거짓말이겠지.
― 넌 키스도 안 해줬어. 
   
― 혹시 내가 잠꼬대는 하지 않았어?
― 자꾸 무섭다면서 침대 밑으로 들어가려는 걸 말리느라 힘들었어.
 

그는 언제나 ‘메이 손에 끌려’ 행동한다. 술집 화장실에서 구두끈으로 목을 매달았던 그를 구해주었던 것 또한 메이였다. 그가 언제나 주머니에 ‘작은 플라스틱’ 약통을 넣어 다닌다는 사실을 통해 독자는 주인공이 어딘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리 장애를 앓고 있는 그가 약 혹은 술로 인해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해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커티스라고 불리는 사나이가 시신 안치실로 향하며 메이와 나눈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 괜찮아. 커티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내 왼손등 위로 포개진 메이의 손을 밀어냈다.
―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니야. 어제부터 네가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뿐이야.
 

세계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자신을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메이를, 그리고 독자를 향해 ‘괜한 짓’을 하지 말라고 커티스는 말한다. 그는 자신이 주인공인 소설에서 주인공으로서 이해받기를 거부한다. 주어진 배역을 밀어낸 그는 이렇게 말한다.

 
 
Ⅲ. “알잖아. 난 커티스가 아니야.”
 
커티스가 ‘커티스’로 불리는 것은 소설이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부터이다. 그 전까지는 메이도 ‘메이’가 아닌 ‘여자’라고 불리며, 여자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랬던 그가 얼굴에 난 커다란 구멍에 튜브를 쑤셔 넣고 있는 이모가 등장하는 악몽을 꾼 이후로 그들에게는 이름이 붙는다. 그들의 이름이 왜 하필 커티스이고 메이필드인지 고민하는 대목을 통해 그가 이름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이름을 쉽게 규정짓는 커티스는 자신의 생활 세계인 한국에서의 삶에도 관심이 없다. 영화가 망했다며 욕을 퍼붓는 감독에게, 당신의 아내와 나는 밤마다 몰래 만난다고 이야기를 하고선 전화를 끊어버린다. 한국에서는 장례식을 하는 동안 멍청한 표정으로 손님들의 절을 받아주면 된다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그는 어떠한 공간에서도 ‘배역’을 맡는 일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이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카, 영화의 흥행에 책임을 지는 배우, 약통을 들고 다니는 환자. 그는 아무런 역할도 맡지 않은 채 세계를 등지고 있으며 매 순간마다 가면을 쓸 뿐이다. 주인공은 행위에 대한 이유를 덧붙이고 이해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태도를 비웃으면서 자신이 감각한 것만을 늘어놓는 일에 골몰한다. 소설의 결말까지도 독자는 그가 검시관과 이야기를 하며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저 그가 ‘안치실 창 안으로 밀려오는 해변의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상우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캐릭터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소설 세계를 만들어냈으며, 동시에 그 인물은 세계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치>의 특별함이 드러난다. 공간적 배경이 브라질이 아니라 세계 그 어느 곳이라고 하더라도 소설의 플롯에는 문제가 없다. 애초부터 영화 속 모든 조명은 ‘커티스’ 라는 인물만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이 독자들에게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지라도 작가는 서사를 진행시키는 데에 스스럼이 없으며, 굳이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커티스와 유사하다.

따라서 우리는 커티스를 따라가는 동안 주연이 되기를 거부한 주연의 영화를 본 듯한 기분이 든다. 주인공에게 브라질의 해변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모의 시신을 본 느낌은 어땠는지를 묻고 싶지만 그는 영화 홍보 행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의 흥행에는 연연하지 않고 해외로 나가버렸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름을 불러본다 하더라도 그는 ‘나의 이름은 커티스가 아니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이영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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