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타자로서의 탈식민주의, 프란츠 파농의 '검은피부, 하얀가면' [문학]

글 입력 2016.11.0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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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삶은 누구나 살 수 있다.
프란츠 파농 - <검은 피부, 하얀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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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차별을 받은 흑인, 피부색에서 기인한 '타자'로서의 취급으로 그들은 아파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영원히 '타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타자 그리고 탈식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자. 식민주의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한 마노니와 파농의 말을 빌어본다. 쌀쌀한 겨울 책읽으며 온 두뇌를 풀 가동시켜보자. 조금은 어려운 이 책 추천드립니다.



I 탈식민주의, 마노니 그리고 파농
 
   문학비평용어사전에서 말하는 '탈식민주의'는-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이어서 광범위한 분야를 포함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제국주의 시대 이후, 독립을 한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제국주의의 잔재를 탐색해서 그것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극복하자는 문예사조이다. 그래서 탈식민주의는 현재를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적 상황으로 파악하고, 제국주의적인 억압구조로부터의 해방의 추구, 제국이 부여한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정체성의 수립, 그리고 더 나아가 불가시적인 문화적, 경제적 제국주의에 대한 경계를 제안한다. 즉 식민주의가 주로 지리적 식민지 그 자체에 주된 관심이 있다면, 탈식민주의는 문화적 또는 정신적 식민지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전한다. 이에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속에서 마노니와 파농은 심리학적 그리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식민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콤플렉스와 행동 경향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


   마노니와 파농은 식민지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에서 주로 그 인과관계, 또는 부분과 전체를 보는 시선에서 차이를 달리한다. 예를 들면 마노니는 열등콤플렉스를 식민주의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는 심리학의 설명체계를 빌려 잠재적 심리작용 방식을 근거로 제시한다. 비유를 하자면 마노니는 어떤 환자의 정맥돌출은 '외상경험'을 통해 그가 온종일 서서 일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반면, 파농은 외과학의 입장에서 '작업조건'은 단지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을 뿐이며 사용자의 책임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파농은 그 행동 자체보다 그 행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환경과 같이 더욱 구조적이고 총체적인 시선으로 원인을 파헤치려한다. 하여 파농은 마노니가 1차원적인 방식으로 결과에 대해 접근하여 다른 야기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노니의 ‘인종차별이 경제적인 상황과 무관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파농은 이를 반박하며 그의 주장을 공고히 한다. 식민주의는 그것이 지니는 강도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식민주의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이것은 경제상황과 같이 외부적인 것(구조)으로 보이는 문제에도 해당된다. 파농은 말한다. "한 가지 유형의 비인간적 행위를 다른 유형의 비인간적 행위와 구분하려는 시도는 매우 유토피아적이라는 점이다."


  남아프리카의 백인 프롤레타리아들은 흑인 프롤레타리아들을 경멸했다. 마노니는 이것이 흑인에 대한 백인의 감정적 인종차별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경멸에 가까운 백인들의 실질적 감정요소 외에 '경제적 구조'이라는 또 다른 식민지적 상황을 간과한 사고다. 이는 불가시적인 경제적 제국주의로 인해 야기된 것이며 그 요인에 인종이라는 배타적 요소가 섞여있는 것일 뿐이다. "경제적 배타성은 그 무엇보다도 경쟁에 대한 공포와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백인 프롤레타리아들의 보호 그리고 그들이 현재의 생활수준 이하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 욕망으로부터 추동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한다. 결과적으로 백인 프롤레타리아들은 새롭게 밀려들어오는 흑인 프롤레타리아들로 인하여 자신의 경제적 수준이 추락할 것이 두려워, 피부색을 핑계 삼아 그들을 더욱 깎아내리는 데 열중한 것이다. 흑인 프롤레타리아를 향한 백인 프롤레타리아의 공격적 성향이 근본적으로는 남아프리카의 경제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마노니는 깨닫고 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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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


 
II 탈식민주의의 확장
    
   이러한 경제 구조적 영향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 확장되어 적용될 수 있다. 탈식민주의가 현재를 또 다른 식민지적 상황으로 파악하고 해방을 추구하는 만큼, 어떠한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위치를 보존하기 위해 타인에게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에 유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의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이 병존하는 사회에는 여러 타자들이 존재할 수 있다. 또한 동서양의 구분을 제외하고서라도 계급, 인종, 젠더적인 타자가 남아프리카의 흑인 프롤레타리아들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이 3가지는 각각의 경우로 나타나기 보다는, 2가지 이상이 서로 연관되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사례가 많다. 특히나 경제적 구조와 연관되었을 때 그 사례가 더욱 격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 사례는 반유대주의정서를 들 수 있다. 파농 역시 남아프리카의 백인 프롤레타리아들의 적대적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반유대주의 정서를 유비적으로 대응시켰다. 사르트르가 말하길, 반유대주의적인 정서가 유행할 때에 대부분의 백인부자들은 그 열풍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편의에 맞게 이용할 뿐 자신들의 할 일로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소속된 사회에 들어올 경우,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는 백인 중산층의 경우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채 같은 저택은 고사하고 개집만한 집 한 채와 손바닥만 한 땅뙈기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열등하고 사악한 존재로 취급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엘리트 계층에 소속되어 있다는 심리적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유대인들을 자신의 사회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 그리고 타자로 취급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보존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위고하나 재산크기를 막론하고 본질적인 측면에서 유대인을 혐오하는 풍조였다면, 백인 부자들이 반유대주의 정서에 반응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계급적인 요소와 경제적 환경이 맞물려 있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인종적인 타자로 몰아 사회로의 유입을 혐오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사례도 들 수 있는데, 일명 '제노포비아(Xenophobia)', 일방적인 외국인 혐오에서 확장된 것으로, 그 기저에 경제적 침투에 대한 반감이 깔려있는 것이다. 2015년 9월 방영된 KBS2 '이웃집 찰스' 에서 방영된 '터키인 형제' 편을 참고할 수 있다. 이 형제는 다른 내국인 노점상 점포와 마찬가지로, 자릿세 납부를 비롯하여 합법적인 운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노인이 '한국 사람도 일할 자리가 없는데 왜 외국인에게 자리를 주느냐','자릿세는 내고 운영하느냐' 는 식으로 큰소리를 내는 광경이 목격된다. 또 얼마 전 지하철에서 목격한 상황에서는 한국인 할머니가 조선족 아주머니를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모두 같은 돈을 내고 탔는데도, 조선족 아주머니께 '한국인 앉게 해야 한다', '조선족 때문에 한국인 일자리가 없어진다'며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자국인의 경제적 위치, 우월적인 위치를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자신의 큰소리에 정당성을 부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명백히 일전에 명시했던 '백인 프롤리타리아의 경쟁에 대한 공포, 그리고 현재의 생활 수준이하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욕망'과 동일시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 하나의 인종적 타자에 대한 착취로 볼 수 있다. 같은 동양인임에도 이뤄지는 이러한 배타적 처우는 옥시덴탈/오리엔탈리즘을 떠나 존재하는 인종적 타자에서 기인한다. 이것 또한 경제적, 계급적, 인종적 특성이 모두 반영된 착취의 형태이다. 착취는, 어떤 형태의 것이건, 서로 엇비슷하다. 모두 성서적 칙령을 존재기반으로 삼아 자신의 정당성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젠더적인 타자로 모는 경우가 있다. 젠더에는 여성을 비롯하여 '성'으로부터 유발될 수 있는 모든 특성을 포괄한다. 당장 우리나라의 사례만 보더라도, 2014년 인기리에 방영한 tvN 드라마 '미생'에서 '안영이' 캐릭터를 들 수 있다. 극 중 '안영이'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엘리트 신입사원이다. 여기서 직장상사인 '하 대리'가 그녀를 나무라는 장면은, 상사로서 회사 내 규칙을 익히게 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자신보다 잘난 그녀가 자신을 누르고 승진할까봐 '여자'라는 성별을 내세워 기를 꺾으려는 의도도 내포되어있다. 남아프리카 백인들은 절대다수가 흑인들이나 유색인들을 자신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놓는 것에 대해 물리적으로 가시적인 반감을 보이는데, 이는 전혀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들과 동급이거나 자신들보다 뛰어날지라도, 자신을 뛰어넘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플의 CEO 팀 쿡(Tim Cook)과, 미국 롤링스톤지에서 눈여겨봐야할 아티스트 10에 든 신예 뮤지션 트로이 시반(Troye Shivan)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각자의 커리어를 착실하게 이어나가고 있는 남성 동성애자, 게이(gay)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애플의 몇몇 아이폰 소비자들은 CEO 팀 쿡이 '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의 젠더적 특성과 상관없는, '아이폰' 제품에 대하여 예약을 취소하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또한 트로이 시반의 경우 정식 데뷔이전 본인의 젠더적 특성을 담은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발표했으나, 정식 데뷔이후에는 동일 곡이 '이성에 대한 사랑'으로 편곡되어 발매되는 등 불가시적인 문화적 제국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이는 대상을 젠더적 타자로 취급하면서 그들의 기득권 취득이나 앞길에 시련을 겪게 하는 일종의 '착취'의 한 모습이다.
   위 사례들은 마노니가 말한 '식민화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만이 식민화될 뿐이다'라는 주장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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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tempes't 의 한 부분을 그린 그림 >



III 다양한 콤플렉스를 대신하여

   마노니와 파농 모두 식민주의를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적인 측면으로 분석했다. 마노니는 단순히 피부색깔에서 원인을 찾고자 하였으나 파농은 조금 더 깊게 들어가 '열등 콤플렉스‘와 ’의존 콤플렉스'에 대해서도 분석하게 되었다. 위에서 다룬 경제적 배타성에 의한 인종차별은 여러 구조적 인종차별 원인 중에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적대적 태도가 이어지는 경우, 타겟이 되는 대상은 점점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되고 각종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 우/열을 나누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불안감인 것이다. 열등한 대상을 조작해낸 장본인은 바로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그리고 마노니는 마침내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프로스페로 콤플렉스'를 명명한다. '프로스페로 콤플렉스는 무의식적 신경증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가부장적 식민주의자의 초상"과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의 손아귀에 잡혀 (상상적인) 강간을 다하는 딸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의 자화상"을 그 내용으로 거느리고 있다.' 프로스페로는 본국에서 쫓겨나 딸과 함께 '무인도'에 정착한다. 그러나 이 '무인도' 역시 서구의 지도에 서구의 글자로 기록되지 않은 곳이며 실제로는 원주민이 살고 있다. 원주민이 살고 있는 곳에 타자로서 입장하게 되는 프로스페로는 오히려 이 곳에서 '식민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그는 그곳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이 구축한 그들만의 세계를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소위 타자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이다. 타자가 존중을 받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어떠한 경제적, 물리적 이득을 위해서 상대방을 '타자'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타자'라는 프레이밍이 씌워진 이후에는 인간적 대우가 아니라 '타자'로서 취급되어 깎아내리고 끌어내리는 경우가 있다. 파농이 인종차별과 식민주의를 구조적인 관점에서 인과관계를 파악하려고 했던 이유는, 백인이 흑인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개개인을 알아보려고 하는 태도로 진정성 있게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로를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고 지배하려는 대상, 지배당하는 대상으로 보았던 경향이 크다. 이것은 현대의 프로스페로 콤플렉스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련의 갈등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식민지의 백인은 어떤 경우에도 열등 콤플렉스를 느끼는 경우가 없다. 그리고 여기 사는 어떤 흑인도 자신이 소수자인 백인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농이 바라보았듯이, 총체적이 구조와 국가적 상황을 바꿔야 개개인들의 존중받는 삶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한 개인의 성적 욕망을 구성하고 결정하는 진정한 조건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계급투쟁의 조건으로부터 추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개인이 꾸는 꿈의 내용도 종국에는 그가 살고 있는 문명의 일반적인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단번에 총체적 구조를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존중과 같은 미시적인 조건의 만족을 통해 서서히 구조와 같은 거시적 조건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속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야한다. 독일 나치 때의 아이히만처럼 그저 시키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기만 하면 안 된다. 바로 당신 같은 이의 맹목적 무관심이 아니었더라면, 그 사악한 범인들이 당신만큼이나 그들 스스로도 부끄러워하는 그런 인면수심의 행동을 감히 감행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농이 일련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 마음먹은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타자'일 우리도 마음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이다. 매번 어떤 인간은 정신의 존엄성을 상대로 승리를 간취했다. 매번 어떤 인간은 동료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는 그런 인간의 행동에 연대감을 느낀다. 그가 결론을 대신하여 말을 이은 것처럼, 왜 타자를 소박하게 만지고, 느끼며, 이를 통해 서로를 발견하려 하지 않는가? 우리는 무분별한 이익 추구적 그리고 배타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원래부터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앞으로도 그렇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야 할 것이다. '대단히 모호한 시각으로 그렇고 그런 착취의 구조를 검토하게 되면, 놓치게 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바로 인간을 제 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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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 <검은피부, 하얀가면>


[고다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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