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는 스톡홀름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연극 스톡홀름.

글 입력 2016.11.0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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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톡홀름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연극 스톡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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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스톡홀름은 서사가 없는 극이다. 서사 없이 단지 ‘상황’만이 주어지고, 그 안엔 대사들이 표류하고 있다. 인물들은, 혹은 의식들이라 부를 수 있을 듯한 그들은 대사를 주고받는 듯 보이지만 그들의 대사는 그저 떠돌기만 할 뿐이다. 보통 대사는 상대나, 혹은 관객을 향하기 위해 뱉어지지만 스톡홀름에서의 대사는 떠돌기 위해 뱉어지는 듯하다. 대사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하나 둘씩 표류하는 대사들이 모여 만들어낸 극 전체의 분위기가 관객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도 대사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상황을 덩어리째로 떼어내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여자, 그리고 문제
 
극은 여러 명언들을 나열하는 한 여자의 중얼거림으로 시작한다. 쇼펜하우어가 그렇게 말했던가요, 버나드 쇼가 말했던가요. 제발 검색 좀 해줘요, 헷갈려 죽겠어요. 햄릿이 그렇게 말했던가요. 그렇게 타인의 말만을 담던 여자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런 생각이 없는 자신을 문제 삼는다. 그리고 문제가 된 ‘자신’은 우리 그리고 세계로 확장된다.
 
여자가 옮긴 명언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여자는 계속해서 ‘타인의’ 말을 옮겨 담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 진위도 알지 못한다. 그 명언들 사이에는 큰 연관성을 찾을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명언들의 내용이 아니라 ‘여자는 타인의 말만을 옮겨 담고 있을 뿐’이란 것이다. 앵무새처럼 타인의 말만을 말하는 여자에겐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여자는 햄릿의 말을 인용하며,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끝도 없이 연쇄되던 고민은 결국 ‘아무런 생각 없는 자신’으로 귀결된다. 여자가 본인이 아무 생각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계속해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보며 흔히들 말하는 ‘페이스북 정치’가 생각이 났다. 현재 사회를 사는 우리에겐 개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정보들이 주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부터 수많은 선택들을 하게 된다. 복잡한 사회 속, 인터넷 속에 여러 생각들은 범람한다. 그 범람하는 생각들 사이에서 진짜 진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렇게 개개인은 생각을 하다가, 생각을 많이 했기에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생각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멍청해진 것은 너무나도 복잡한 현대사회에 기인한다. 생각을 포기한 개인은 단지 ‘자신은 멍청하다’고 생각하며 페이스북 등에 떠도는 ‘남의 생각’들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앵무새처럼 읊을 뿐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클로디어스
 
클로디어스는 형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 클로디어스는 계속해서 형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못생겼고, 멍청하며, 유치하기에 형이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는 형을 선망하며 그렇기에 원망한다. 그는 ‘말을 해’라는 형에게, ‘형이 말을 하라고 하기 전 그 짧은 순간 말을 하려고 깊게 호흡을 했지만 형이 말을 하라고 해서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라고 말한다.
 
말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진 현대사회 속 외려 우리의 입은 틀어 막혔다. 우리가 선망하는 ‘말을 잘하는 사람’, ‘생각 있는 사람’. 혹은 ‘생각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말하고, 또 말하기를 촉구하는 인터넷이란 장 속에서. 우리의 입은 부끄러움으로 틀어 막혔다. 이는 곧 무지로 이어진다. 말하려고 숨을 집어넣었다가 ‘말하라’고 듣는 순간 호흡이 막혀 과호홉으로 쓰러졌다던 클로디어스의 말처럼. 말하고자 했을수록 부끄러움은 더해져 입을 닫게 된다.
 

 
#제 46의 수병
 
제 1의 수병이 전진한다, 앞으로!
제 2의 수병이 전진한다, 뒤로!
제 3의 수병이 전진한다, 밑으로!
제 4의 수병이 전진한다, 아래로!
제5의 수병이 전진한다, 아무데로! 아무데로! 아무데로!
제 15의 수병이 전진한다, 어디로? 이유는? 모른다. 모른다.
    

이상의 오감도를 연상시키는 ‘수병’들은 모두 어디론가 간다. 앞으로, 뒤로, 밑으로. 하지만 이들은 결국 아무데로 가고 있다. 아니, 혹은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인지 이유도 모른다.

이는 천안함을 빗대어 어디에도 없는 진실을 말한다. 천안함 사건 이후 수많은 말들이 떠돌았다. 앞으로, 뒤로, 밑으로, 아래로 전진하는 수병들처럼. 수많은 가설들이 제기되었고 수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 수맣은 말들 속 ‘진실’은 아무데도 없었다. 혹은 어디에나 있었다. 천안함의 진실은 어디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각자가 ‘제 *수병이 전진한다’고 말하면서도 ‘어디로 갔는지, 이유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처럼. 우리 또한 수많은 말들을 떠들고 들었지만, 진실을 알지 못한다.
 
 

#모두가 말하는 모름과 미침.

“우린 다 미쳤어요. 우린 다 미쳐버렸답니다.”
“미치면 좋아요?”
“그럼요. 해피 투게더~”
“그럼, 우리도 미칠까요?”
“잘 알고 있지요.”
“뭘 잘 알고 있단 얘긴가요?”
“우린 사실 아무것도 몰라요.”
“뭘 정말 모른다는 말이죠?”
“우리는 뭘 아는지, 뭘 모르는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요?”
“어떻게 그럴수가 있죠?”
“괜찮아요. 원래 그런거예요.
 
 
극에선 위와 같은 대화가 몇 번이고 반복된다. 마치 노래를 부르듯이, 남녀로 나뉘어서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위 담화는 굉장히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모두의 목소리로 이루어졌으면서, 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듯한 기묘한 소리. 그러한 목소리로 그들은 ‘모두가 미쳤다’고, 또 ‘무엇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라고 칭한다. ‘우리’는 개개인으로 이루어져있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이다. 그 목소리는 개개인 각자의 목소리면서 전체를, 이 사회를 의미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리고 미치면 행복한 개개인이 모여 만든 사회는 ‘아무것도 모르고 미친’ 사회다. 모른다고 말하면서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 무지에의 무지. 이는 실질적인 ‘모름’이 아니라, 알고자 하는 의지의 결여를 말한다. ‘몰라요’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뭘 모르는지도 생각할 생각도 않고 단지 ‘몰라요’라고 말할 뿐이다.
 
그렇게 모두가 ‘알려고 하지 않고’, 단지 ‘미쳐서 행복한’ 사회 속. 진실은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스톡홀름
 
“우리 함께 돌아가요, 아가처럼!”
“어디로 가나요?”
“스톡홀름이죠.”
“왜요?”
“뭘 그런걸 물어봐요?”
 
스톡홀름이라 했을 때는 사실 ‘스톡홀름 증후군’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그저 어딘지, 왜인지도 모르면서 ‘어디론가’ 향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스톡홀름이란 지명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아가’처럼 스톡홀름으로 가야한다는 말처럼 ‘스톡홀름’이란 것은 우리를 이렇게 ‘진실’도 알 수 없게, 무기력하게 만든 현실에 대한 동조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는 아무 생각이 없기에 행복하다.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애정을 가지는 것처럼.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 현실에 우리는 동조해서 살아가고 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 이유 없이 ‘스톡홀름으로 가자’는 말이 괴이하게 들리는 것처럼, 우리는 그 괴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아빠 없는 소녀를 욕하는 것은 정말, 음악적이다!”
“사는게 원래 그렇다는 말은 하지 말자.
 
 
참 기묘하게 들렸던 말들이다. 그리고 어쩐지 이 극의 주제라면 주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빠 없는 소녀가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내가 떠올린 것은 극에서 계속해서 말하듯이 진실을 은폐하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누군가였다. ‘사는게 원래 그렇다는 말’도 그렇다. ‘사는게 다 그렇다’, ‘사는게 원래 그렇다’는 말은 누군가의 아픔을 보편적인 것으로 치환하며 봉합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내게는 아빠 없는 소녀와, 사는게 다 그렇다는 말이 이상하게 조화를 이루며 다가왔다.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진실을 은폐하는 소녀와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 시대에서 우리는 ‘사는게 원래 그렇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사는건 ‘원래’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진실을 은폐하기에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원래’라며 승복하지 않고 진실을 알고자 노력해야한다.
 
연극이 원래 뜻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낀 스톡홀름은 그랬다.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사실은 나를 해치고 있는 그들이, 가시적으로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그들에 동조하지 말고. 사는게 ‘원래’ 그렇다는 생각에 갇혀 가만히 있지 않고. 그 현실을 깨고 나와야 한다고. 진짜 진실을 찾아야한다고. 연극이 말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에게는 참 여러모로, 시기 적절한 연극이었던 듯 하다. 

이 연극 덕에 더욱 확실해졌다. 연극은 내게 하나의 다짐을 하게 해 주었다. 나는 미쳐서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이렇게 만든 무언가들과 맞설 것이다. 맞서지 않더라도 적어도 계속해서 생각할 것이다. 생각이 나를 무지하게 만들지 않도록 주의하며, 생각에 지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는 계속해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말들은 결국 한마디의 다짐으로 귀결되었다. 


나는, 스톡홀름으로 가지 않을것이다. 



권희정 (1).jpg
 

[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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