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하나도 재미없네요,「곡도와 살고 있다」." [문학]

글 입력 2016.10.22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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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도의 뜻은 꼭두각시의 잘못, 혹은 환영(幻影)이란다. 무대 위에 오른 꼭두각시는 무대 뒤에 조종자의 뜻에 따라 동작을 취하고, 조종자의 말을 대신 전한다. 환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보이는 허깨비. 그런데 G 앞에 나타난 것은 말하는 고양이. 도대체 이 카레 색깔의 고양이는 무엇인가.(카레 색깔이라니, 분명히 가필드와 같은 종일 것이다.)

인간의 인식 이전에도 존재와 존재 사이에 대화는 이루어진다. A와 B가 존재하면 그들 사이의 거리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리는 차이나 동질성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뿜어 올린다. 이는 우리가 인식하기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이며, 우리는 단순한 발견자에 불과하다. (A가 단독으로 존재한다면 ‘아무도 없음’과 함께 존재한다고 인식하거나 ‘A가 존재하지 않음’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이것을 마주한 낯선 발견자는 궁금한 것이 많다. 그래서 G가 곡도를 앞에 두고 생각했던 ‘말의 맥락의 이미지’는 천체망원경으로 찍은 밤하늘의 별 사진과 같을 것이다. 가보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하고 평가해버린 것들의 집합이자, ‘말’을 넣어버린 화수분처럼 끝없이 변형, 복제되는 이야기들을 품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G에게 ‘말’은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혹은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홀로 살며 샤워할 때 씻는 순서까지 기억해두고 삶의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흔히 말하는 ‘혼술남녀’에 속하는 G는 새로운 관계나 소통에 서툴러 보인다.

그런 G에게 곡도라는 존재가 다가왔다. 곡도는 말을 할 줄 알 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더불어 주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문제를 일으킨다. 문제가 커지면 최종적으로 주인은 자신감, 미소, 그림자, 눈꺼풀과 같은 것을 잃고, 곡도는 소통능력을 상실하고 동물화된다. 한 번 시작된 관계, 소통이 실패하면 양쪽에 모두 ‘같은 비중의 손실’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G와 곡도가 작가와 독자에 대응한다는 매우 상투적인 발상을 하게 한다. ‘타이프체’의 음성으로 주인의 이야기를 평가하는 곡도는, 작가를 대면하지 않고 문자언어로 작품을 평가하는 독자들에 적절히 대응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조종자와 꼭두각시의 입장이 역전된 상황은 독자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작가의 모습을 조롱하는 것 같아, 이러한 상투적 비유는 매우 그럴싸하다. 창작과 비평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기류와 수많은 내적 고뇌들이 곡도와 주인 사이에도 보이는 것 같다.

한편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곡도이자 주인이다. 지나간 기억들,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은 기록해두거나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면 흩어 없어진다. 우리의 이야기는 말할 것이 없어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되어버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상실되려는 이야기들을 누군가를 대상으로(그것이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들려주면서 재미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인지 확인하는 우리는 G처럼 처량하다. 하지만 이러한 불완전한 상태는 참여할수록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이와 상통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인물 중 영화감독을 맡은 배우 정재영은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짧은 답변을 원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외친다. “...영화도, 저라는 사람도, 여러분의 삶도! 그런 말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말의 힘?, 웃기고들 있네, 진짜.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런 말들을 찾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저는요 그런 중요한 말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지…….”여기서 ‘그런’말은 어떤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겸손과 새로운 다른 종류의 것들을 발견하려는 용기를 포함한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말의 맥락의 이미지’의 범주를 상정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고 설명되면 오히려 소통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 즉 본 소설과 위 영화는 모두, 관계를 언어적 소통으로만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언어라는 허깨비와 살고 있는 것이다. 그 허깨비는 자신이 꼭두각시로서, 소통의 매개체인 척 하지만 우리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조종하는 아이러니한 존재. 때로는 오만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고양이라는 동물적 속성에도 매우 적절하게 대응된다. 마지막의 G가 했던 이야기의 끝은 말이 아닌 “......음.”까지만 표현된 생각이다. 곡도의 반응 역시 “흐음.”소통에 성공한 것일까. G가 경험한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서술자는 G가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아직 말하지 않았는지를 짚으며 이야기를 끝낸다. 우리는 동시에 이 소설을 평가한다. 그러면 소통이란 무엇일까. 언어로 소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무책임하면서 인간 소통에 대한 씁쓸한 사실을 짚어낸 이 소설에 대한 나의 평가는 이렇다. 소설 자체가 곡도, 즉 허깨비.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하나도 재미없어요.”

지금 나의 글에 따르면, 나는 글을 더 이어갈수록 이것을 읽는 당신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이만 글을 마쳐야겠다. 소통하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소설에게 묻기를.


[나진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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