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안에 밥 싸먹기 [문학]

일상의 불안을 포착하는 시인, 여태천 『국외자들』
글 입력 2016.10.22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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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열심히 살아들 가는 걸 보면 참 신기해.”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주다가, 갑자기 움찔했다. 그러게, 어떻게 사람들은 꼬박꼬박 적금을 붓고, 
매년 새해 계획을 세우고, 출근시간에 맞춰 버스를 탈 생각을 하는지.  


 사는 것은 너무나 명확해 보이는 것들의 연속이지만, 한발만 떨어져 바라보면 이렇게 불명확한 것도 없다. 나는,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아주 조금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불안’이 싹 튼다. 불완전한 존재를 뒤쫓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이는 우리에게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명확’한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그렇게도 매달려온 것을 보면 말이다. 한 철학자는 이러한 ‘불안’의 해소가 두 가지 방향으로 시도되었다고 말했다. 하나는 과학이며 다른 하나는 신학이다.(RussellBertrand, 2009) 필자는 여기에 현대인들에게 유용한 해소법 하나를 덧붙이려 한다. 바로 ‘일상’이다. 

  ‘일상’이란 단어에 묻어 있는 ‘편안함’은 그것이 가진 ‘불안해소 능력’을 반증하는 듯 하다. 이것은 반복되는것이고, 보통의 것이며, 안다고 믿는 것의 세계다. ‘일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불안의 해소를 가장(假裝)한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해소법은 아닌 것이다. 종로3가 역을 지난 1호선 열차가 곧 종각역에 도착할 것임을 믿고, 명사 ‘태양’은 ‘하늘의 빛나는 둥근 것’임을 믿고, 누군가 말한 좋은 대학에 들어가 너와 나의 핸드폰을 만든 그 기업에 들어가면 나는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 ‘일상’은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불안을 감춘다. 이 세계의 알 수 없는 것, 아직 규정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해소되지 못한 채, 불안은 일상의 순간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불안을 포착하다. 『국외자들』

 여태천 1.png 

 『국외자들』(2006)에서 시인 여태천은 비집고 나온 불안들을 포착하고 있다. 「저녁의 외출」에서는 특히 이런 불안감이 잘 드러나고 있다. '불안에 밥을 싸서 저녁을' 먹고, '버스를 타고 다니다 집 앞에 도착한' 것은 '불안'이지만 이는 곧 '나'라는 존재와 다르지 않다.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종교'조차도 '나'의 불안을 해소시키기엔 역부족이다. 방치된 불안에는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가 열린다'. '불안'은 '매일 찾아오'는 것이지만 이를 해소해 줄만 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여태천 2.png

 「불치의 병」에서는 더 이상 일상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불안의 심화가 드러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촉발된 불안은 '아내'로 하여금 '집'을 옮기는 데 '열심이'게끔 만들었다. '열심'히 불안을 털어 보려 했고, '일간신문'과 '광고 전단지'는 아슬아슬하게 일상을 유지시켰다. 그러나 새로 옮긴 '집' 곳곳에 남몰래 쌓이고 있는 것은 또 다시 불안이다. '이중으로 문을 잠그'는 행위와 '누군가 우리 집을 훔쳐갈지 모른다'고 무서워하는 것은 모두 이 불안의 발현이다. '양말을 신은 채로' 잠이 들고, '가슴에서'는 '숭숭'거리는 '바람 소리'가 난다고 울음을 터뜨린다. '아버지'라는 가장 가까운 존재이자 가부장이었던 존재의 부재, '죽음'이란 것이 살아있는 이들에게 던지는 불명확성은 '나'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킨다. '불안'의 해소를 위해 종교(「저녁의 외출」,「너무나 관념적인 사건」)와 일상에 기대보지만, 이는 그저 해소를 가장하는 현대인의 ‘제의’(祭儀)일 뿐이다.

 여태천의 시는 담담하지만 섬세하게 현대 도시민들의 내면을 그려낸다. 우리의 일상에 만연해 있는 '불안'을 포착하고 이것을 건드린다. 감춰져 있던 불안을 촉발시키는 것이 그의 시가 가진 역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시속에서 다양한 증상으로 얼굴을 내미는 '불안'은 우리와 자신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 존재자체가 불완전하고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여태천의 '불안'은 일상을 유지시키는 우리의 '믿음'들이 사실상 '헛것'일지도 모른다고, 우리 삶의 순간들은 사실 '불명확한' 순간의 연속이라 말해주는 듯하다. 

 
[이서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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