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숲과 만나다 [시각예술]

글 입력 2016.10.2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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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만나다
김남수의 '숲' 시리즈를 감상하고



숲과의 만남

  종이에 웬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다. 김남수의 작품들을 처음 스쳐보면 형태와 색의 모호함 때문에, 작품을 유심히 살피고 제목을 알기 전까지는 관객을 당황스럽게 한다. 그러나 중간중간 미묘하게 느껴지는 나무의 형태와 그런 나무들이 띠를 두르며 산등성이와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관객은 거대한 숲과 마주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세상과 격리된 숲에서의 개인은 스스로 고립되어 사색하는 시간을 갖고 진정한 자신과 만나게 된다.


평온한 사색의 공간 - 숲1303
 
 한지와 먹으로 이루어진 흑백의 표현은 겨울 산의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백색의 눈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뭇잎 하나 걸치지 않은 앙상한 나뭇가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겨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 숲은 나무들이 전체적으로 덩어리져 있고 함께 뭉쳐 있기에 그 모습이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일단 풍성하다. 흔히 무채색과 겨울을 연결하는 기존 관념이 그의 작품 속에서 맞지 않는다는 점은 그림을 계절이 아닌 시간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게 한다. 나무들이 숨을 죽이고 자신의 색을 완연히 드러내지 않는, 빛이 막 퍼져나갈 즈음의 새벽이나 반대로 빛이 그 힘을 다하고 점점 사그라질 즈음의 저녁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산 너머의 배경이 채색이 이뤄지지 않은 한지 그대로의 상태라는 점은 여명이 밝아오며 세상이 환해지는 새벽녘을 떠올리게 한다. 황혼 무렵의 한 줌의 노을빛도 허용하지 않는 새벽의 그 푸르른 느낌, 아직 해가 뜨기 전, 붉은 빛이 감돌기 전의 눈이 시리도록 시원한 느낌의 새벽 숲이 펼쳐져 있다.

  숲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는 점에서 언뜻 보면 산꼭대기에서 그 밑의 풍경을 조망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기보다 같은 높이거나 그보다 아주 약간 높은 곳에서 산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눈앞에서 손짓하고 있는 산과 같은 높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은 산이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 발 뻗으면 금방 닿을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며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작품 자체의 커다란 크기 때문에 관객의 시야는 그림으로 가득 찬다. 자신이 흡사 그 숲속에 있고 주변 나무들에게 포위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결코 흑과 백만이 존재하는 널따란 숲속에서 홀로 남겨진 섬뜩한 느낌은 아니다. 잔잔한 조명은 작품이 원색의 진한 검정색과 흰색이 아니라 낡지만 편안함을 주는 은은한 색감의 한지와 물을 많이 타 부드러운 느낌의 묵색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형태가 유사한 나무들은 인위적이거나 그 모습이 제한적이기보다 조화롭게 어울리며 안정감을 심어준다. 그러나 숲의 전체적인 명암은 부분부분 차이를 드러내며 단조롭지만은 않은데, 다양한 종류의 나무로 이뤄진 숲이라는 점을 인식시키며 실제 있을 법한 공간이라는 현실감을 높여준다. 이렇게 작품이 전체적으로 형태는 모호하지만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룬다는 점은 나무들이 저마다의 기운을 내뿜는 무서운 숲에 관객이 덩그러니 놓인 게 아니라, 서로 하나의 ‘숲’을 이루며 살아 움직이고 있는 생명의 공간에 그들과 함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곳, 흔히 떠올리는 우리 주변의 포근한 숲에서의 사색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안기며 평온한 사색을 돕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등성이와 깊은 골짜기는 세상과의 강한 단절을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산등성이 너머의 흰 부분, 운무가 퍼져 나가는 모습은 고요함과 포근함 또한 그린다. 정적인 화면 구성도 그 조용하고 평온한 모습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속에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과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서부터 산은 우리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운무는 모든 사물의 형태를 모호하게 하고 존재들을 가리기에 직접 그 자리에서 산을 만끽하는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비로소 느껴지는 자유로움.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부터, 스스로 짊어진 책임감으로부터의 해방.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느끼고, 그 자유로운 사색 속에서 그동안 스스로에게 잊혔던 나 자신과 만나게 된다.


숲1303.png

 
낯선 경험의 공간 – 숲1408

  이 작품에서의 숲은 방금 전의 작품보다는 화면이 전체적으로 어둡다. 이제 막 해가 뜨려고 하는 새벽이나, 짙어져가는 저녁, 구름이 껴서 어두운 상태의 숲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멀리 있는 숲이 흐리거나 불분명하지 않고 오히려 진하고 명확하다. 나무들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밝은 빛은 이 작품이 숲의 어느 한 순간을 묘사하려 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오롯이 담아내려 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구름이 껴서 어두운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먼 지평선 너머로 빛이 차차 퍼지고 있는 새벽이나 서서히 지고 있는 황혼녘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나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화면 전체적으로 부분 부분을 어떤 결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나뭇잎의 일렁임을 형상화한 것으로 숲에 역동성을 심어주며 살아있다는 생동감을 강화시킨다. 숲속에서의 이 물결이 바람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보면 나무 사이사이를 타고 넘는 시원한 바람 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자연의 싱그러움을 전한다. 또, 숲 자체의 생명력에 의한 움직임이라 생각하면 신비로운 대자연에 감탄하게 된다. 고요하고 평온한 정적인 느낌의 숲과는 다르게 동적이고 활기찬 느낌의 숲은 우리에게 스스로에 대한 관조를 넘어 능동적으로 질문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선사해준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는 수평선의 위치는 지나치게 높다. 실제 현실에서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구도를 떠올릴 때, 서서 숲을 바라본다기보다는 누워서 풀밭을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누워서 본 풀밭이라기엔 바람에 의해 함께 움직이는 풀들이  서로 가까이 있는 대상임에도 그 결의 흔들림이 일치감이 없고 난잡하다. 그 때문에 여러 덩어리의 나무들이 같이 운동하며 살아 숨 쉬는 숲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가만히 서서 멀리에 있는 숲을 조망한다고 하기에는 저 멀리 지평선 부근의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 앞쪽보다 뚜렷하게 그려져 있어 기묘하다. 이 점에서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은 자신이 그저 가만히 서서 숲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도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게 된다. 숲 위로 빠르게 날아가기에 근처의 나무들은 그 형태가 불분명하고 멀리 있는 나무들의 형태가 오히려 온전히 보이는 것이다.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들 뿐 아니라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도 작품 속의 자연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운동성을 느끼며, 작품은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관객을 비롯한 모든 존재들의 삶의 역동성, 그 심장의 울림을 들려준다.

  ‘숲1303’은 산등성이가 고도별로 겹쳐져 보이며 높낮이가 있다. 드넓은 평야 지대의 숲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산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수평선이 나무로 정렬되어 있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고도 차이가 거의 없는 평야의 숲이라는 느낌을 주어 이국적이다. 이런 익숙하지 않은 생김새의 숲은 관객을 새로운 공간에서의 사색으로 이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정적인 산의 모습이 아닌 직접 운동함으로써 그 생명력을 드러내는 숲의 모습, 그리고 그런 숲과 함께 움직이는 자신을 발견하며 관객은 그동안과는 다른 신선한 경험을 맛본다. 생소한 시선으로 느끼는 낯선 경험은 늘 새로운 영감을 가져다주며, 이는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숲1408.png

 
나와의 만남

  김남수의 < 숲 > 시리즈는 모호한 형태로 단순한 구성의 숲을 그린다. 그러나 그러한 단조로움은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쉽게 작품 속에 몰입하게 돕는다. 작품의 이곳저곳을 직접 살피며 시선을 옮겨야 될 필요 없이 작품 전체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색 또한 흑과 백의 단순한 조화지만, 완전한 단색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명암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관객이 작품을 바라보며 자아와의 만남을 이루는 데에 있어 생각의 흐름이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다.
  관객은 작품이 숲이라는 커다란 주제 속에서 어딜 보든 숲과 나무라는 확신이 있기에 뭔가를 발견하고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그림을 즐기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편안한 마음으로 숲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나’와 만나게 된다는 측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놀랍다. 관객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관객은 어느 순간 자아와 대면하며 능동적인 사고를 발휘하게 되기 때문이다. 잊고 살았던 ‘나’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관객들은 스스로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일상을 살면서 정작 자신에게 무심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며 새삼 놀라게 된다.

  특히나 ‘나’를 만나는 과정이 ‘숲1303’에서는 평온하고 정적인 사색의 공간에서의 익숙함을 통해 이끌어진다면, ‘숲1408’에서는 생명력 넘치는 동적인 공간에서의 새로움을 통해 그 깊이가 심화된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과 만나며 스스로에 대해 오랫동안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궁극적으로 작품 자체를 뛰어 넘어 나 자신에게로 다시 그 탐구의 시선이 돌아가게 된다는 점이 그의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다. 작품 그 자체에서 생각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이 작품을 감상하는 ‘나’에게로 돌아오고, 작품과 깊이 교감하며 관객이 스스로 그 속에 함께 있음을 느낄 때 작품이 완성되고, 진정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이렇게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고, 위로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위안을 얻게 하는 마술적 경험을 선사한다.


[이예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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