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타인에게 맞춰진 아름다움

「장자」를 통해 자신만의 아름다움 찾기
글 입력 2016.10.22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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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예나 지금이나 ‘美(미)’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부동의 관심사다. 시각적인 측면이든 생존을 위한 본능이든 ‘기왕이면 다홍치마’, 예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눈이 낮다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도 그들 나름에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다만 보통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그 기준이 다른 곳에 있거나 느슨한 것일 뿐이다. 나도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려고 노력한 적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예쁜 사람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되고 더 나아가 그들처럼 되고 싶어한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장자」의 동시효빈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옛날사람들도 아름다운 여인을 동경하고 그녀의 행동을 따라하는 모습을 통해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는 원초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친구들과 ‘예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떠오르게 된 생각이 있다. 나의 눈에는 예쁜 것이 다른 친구 눈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지만 장자를 읽고 난 후에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아름다움의 기준을 설정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춰 다양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서로 다른 색의 렌즈로 이루어진 안경을 낀 것처럼 사람들은 각각의 시선을 가지고 같은 듯 다른 아름다움에 열광한다. 도대체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조화로워 질 수 있을까? 지금부터 장자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의문을 하나씩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1. 동경하되 동화되지는 말자

 「장자」의 ‘천운편’에는 마을 서쪽에 사는 아름다운 여인 서시와 그녀의 아름다움을 부러워하는 추녀 동시가 등장한다. 서시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었던 동시는 자신의 본래 모습은 최대한 감추고 서시의 옷이나 행실 등을 따라했다. 선천적으로 가슴통증이 있던 서시는 종종 눈썹을 찌푸리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 동시는 인상쓰는 표정까지 따라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에 표정까지 찌그러지니 그 모습은 사람들이 고개를 저을만큼 가관이었을 것이다. 과연 동시는 찡그린 표정을 자신이 지었을 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봤을까? 아마 자신과 서시의 다른 점은 생각하지 않고 그녀처럼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저 흉내내기 급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동시의 모습이 바보같고 어리석게만 느껴지는가? 나와는 거리가 멀고 나였으면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처음에는 동시효빈 이야기를 듣고 동시가 정말 바보같게만 느껴져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웃고 나서 생각해보니 동시는 어쩌면 현대사회의 우리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서시’가 되고 싶어한다. 여자 연예인이 한번 공항에 나타나거나 인기드라마에 나오는 날이면 그곳에서 착용하고 나오는 의상들은 채 한 시간도 안되어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내린다. 요즘 나오는 스마트 tv들은 아예 드라마 속 소품이 어느 브랜드의 어떤 제품인지 검색해서 보여주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사실 의상이나 악세서리 등을 구입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성형외과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성형을 하려고 오는 고객들이 연예인이나 특정인의 사진을 가져와서는 “이렇게 성형해달라”고 요구한다고 한다. 그럴 때 의사들은 당황스럽다. 요구하는 얼굴과 본래 가지고 있는 고객의 얼굴이 전혀 같아질 수가 없는 상태라 원하는 대로 시술을 한다고 해도 원하는 얼굴이 나온다는 보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 고객이 돈을 주고 해달라는데 마냥 거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나는 지금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하였듯이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모두 같을 수는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 사람은 각자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외모 또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똑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꾸만 자신의 독특함을 버리고 획일적인 미의 가치에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 화제가 된 쇼핑몰 상품 후기 중에 피팅모델이 상품을 착용한 모습과 소비자가 착용했을 때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있었다. 같은 옷도 누가 입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같은 사람에 따라서 아름다움은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왜 미적기준은 하나로만 적용하려고 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설령 객관적으로 못생긴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데 역시 「장자」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덕충부’편에 등장하는 애태타는 절세추남이지만 ‘동시’와는 다르게 그만의 사람됨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외모는 아주 추하지만 함께 지내본 자는 여자든 남자든 계속 함께 있고 싶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마 그는 내면을 갈고닦는 긴 수련을 거쳤을 것이다. 외모에 대해 편견이 있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반하게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못생긴 자신의 외모 때문에 스스로 원망도 많이 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지금 우리나라에 살았다면 성형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고 그것을 개발하였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외모와는 다른 차원에 있는 아름다움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2. 나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

 나는 동시와 애태타를 통해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바로 ‘나만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다. 내가 요근래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하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점은 그것이 부러운 인생을 훔쳐보는데 정말 적합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페이스북보다는 인스타그램이 더 인기있는 서비스로 떠오르는 이유도 그와 상통한다. 인스타그램은 사진을 한 장 올릴 때 그 밑에 짧은 코멘트 정도를 같이 달아올리는 게시형식이 글과 사진, 영상이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는 페이스북과 차이가 있다. 바로 글보다는 사진이 더 직접적으로 타인의 삶을 구경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에 점차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용자를 팔로우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마치 깊은 관계를 맺은 것처럼 좋아한다. 댓글을 통해 어떤 제품을 사용하는지 묻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충격이였던 것은 성형을 해서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쁘다고 칭찬이 가득한 댓글을 보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가식으로 칭찬을 해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칭찬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인정받는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걱정되는 것은 댓글을 단 사람들처럼 정말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거기에 자신을 끼워 맞춰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는 ‘점점 예뻐진다’이다. 이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사람들이 이 말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 기준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예쁜 것이 아니고 이 전의 ‘나’보다 예쁘다는, 평가 기준이 나이기 때문에 이 칭찬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뛰어난 외모는 아니더라도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에서 점점 발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서 상대방이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내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고유함을 살려서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사람들을 동경하고 그들과 같은 매력을 소유하기보다 그들처럼 ‘나’의 매력을 풍기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모두가 헬레네가 될 수는 없다. 아름다운 외모로 전쟁까지 일으키고도 모든 것을 용서받는 참 부러운 존재이지만 너도나도 헬레네가 되려고 한다면 세상은 참 혼란스러울 것 같다.

 「장자」의 내편 중 하나인 ‘응제왕’에서는 혼돈의 이야기가 나온다. 숙과 흘이 자연상태 그대로인 혼돈에게 사람처럼 구멍을 뚫어주니 결국은 혼돈이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획일적인 기준에 자신이나 상대방을 맞춰가다 보면 그 사람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태어난 상태로 혼돈이다. 구멍없이도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었을텐데 어떤 기준에 우리를 맞춰가려다 보니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해치고 있는 것이다. 혼돈의 이야기를 보면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내 나름대로는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베푼 행동도 상대방의 가치를 터득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장자가 ‘응제왕’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의 여신에게

 아름다움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귀여움도 청순함도 발랄함도 모두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다양한 매력을 아름다움이라고 통칭할 수 있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하나의 기준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그래서 다양한 매력 중에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키워나가면 되는 것이고 내면의 아름다움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그런 다양한 것들을 모두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고 시야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하나의 부탁을 하면서 이 글을 끝내려고 한다. 아프로디테는 미의 여신으로 남성들은 물론 신들의 사랑도 한 몸에 받았다. 많은 신들이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그는 결국 신들 중에 가장 못생긴데다가 발까지 절었던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의미있는 선택이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가장 못생긴 신과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헤파이스토스는 성품이 좋아 대부분의 신들이 좋아하고 기술이 뛰어나 그가 만든 갑옷은 어떤 칼도 막아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자신의 기술을 위해 인고의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바라건데, 그녀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지혜로움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새겨져 있는 황금사과를 차지하기 위해 파리스에게 임자가 있는 헬레네를 넘겨줌으로써 전쟁까지 일어나게 되는 섣부른 결정대신 다양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래서 우리도 선택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이야기를 말이다. 우리 모두 헬레네가 될 수 없는 이상 주인공이 내가 될 수 없는 이야기는 흥미롭지 않기 때문이다.


[민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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