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밀스러운 햇살’의 주체는 누구인가-「밀양」 다시보기 [문학]

글 입력 2016.10.2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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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동 감독의 「밀양」과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큰 틀의 설정은 동일하다. 하지만 소설이 영화화 되면서 세밀한 부분에서의 차이가 발생했다. 바로 두 작품이 여성을 그려내는 방식이었다.

  「벌레 이야기」가 「밀양」과 가장 다른 점은 ‘용서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 여성성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아내의 모습이 남편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그녀는 남편에게 의존하려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아들을 잃고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일상을 활력 있게 꾸려나가곤 한다. 아내는 ‘여성’이라기보다 하나의 ‘인간’으로 묘사되면서 주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밀양」에서의 이신애는 남편을 여의고 밀양으로 내려와 아들과 단 둘이 사는 설정이다. 아들을 잃은 여성의 비극성을 심화시키기 위해 남편이라는 캐릭터가 삭제되며, 홀로 남겨진 여성이라는 다소 신파적인 설정이 관객에게 호소한다.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접근하는 김종찬 또한 소설에는 없었던 새로운 인물이다. 그런 종찬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신애가 아들이 유괴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먼저 달려간 곳은 종찬의 카센터였다. 이 부분에서 영화가 그려내는 여성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절박한 순간에 자신의 주변에 남은 몇 없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종찬에게 달려가는 장면은 여성의 캐릭터에 의존성을 부여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범인의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신애는 방탕한 삶을 살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영화는 그 중 하나를 성적 방탕으로 그려낸다. 이는 여성의 성적 방탕이 윤리와 도덕을 어기는 일종의 반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애가 성적으로 타락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그녀의 정신을 의심케 하는 영화의 문법은 여성에게 폭력적인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또한 눈여겨보아야 한다. 신애가 스스로의 머리칼을 자르려 할 때, 종찬이 들어와 그녀의 앞에 거울을 들어준다. 햇살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교회의 말과는 상반되게, 영화는 종찬에서부터 카메라를 비추어 마당에 내려앉은 햇빛을 담아내며 마무리된다. 이 장면은 종찬이 신애에게 실질적인 구원이 되어 주었다는 것을 은유한다. 하지만 종찬이 거울을 들고 있는 장면은 꼭 장례식을 떠오르게 했다. 그는 장례식 발인 행렬의 맨 앞에 서서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사람처럼 거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거울, 즉 장례식에서 망자의 사진을 대체한 얼굴의 주인은 신애였다. 실질적 구원이 곁에 남은 한 남자뿐이라는 사실은 그녀가 스스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애의 주체성은 사라졌으며, 이를 그녀의 장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의 나약함과 불온전함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러나 「밀양」은 불온전한 주체를 인간이 아니라 여성으로 특정 지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아이를 잃은 여성의 불온전한 정신을 붙들어 줄 수 있는 주체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함의로 영화가 마무리되는 점에서, 영화가 여성성을 소비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는 소설이 본래 의도하였던 주제의식을 구현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관객들은 아이를 잃은 엄마의 안타까운 상황에 공감하는 데에만 집중한다. 이로 인해 영화의 부제이기도 한 ‘secret sunshine’의 주체가 남성이라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끼기란 어렵다. 그녀는 아이와 남편을 모두 잃은 ‘불쌍한 여성’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언어를 따라가며 여성 집단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침묵하게 되며, 비슷한 예술의 문법은 반복된다.

  「밀양」은 신적 존재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하지만, 여성의 존재성에 대한 의문의 여지를 지워버렸다. 비밀스러운 햇살을 내리쬐어주는 주체는 남성이며 이를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 주체에 대한 의문을 던지기 시작해야만 비로소 침묵은 깨질 수 있다. 영화의 언어를 그저 따라가기만 한다면, 예술에서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이영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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