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은 가볍고 나에겐 무거웠던, 책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글 입력 2016.10.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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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가 오랜만에 만나고선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좋아하는 책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해서 읽어봤는데 사실 읽다보니 왜 좋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다만 내 생각이 나서 시작한 책이라 나를 만나면 얘기해주려는 마음으로 애써 다 읽었다고 했다. 그렇게 갑자기 뜬금없게 질문이 던져진 것이다. 올해에도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별 고민 없이 툭 내뱉은 책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생각나지만 이야기도 드문드문 기억나는 이 책을 대체 나는 왜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말했을까. 혹시 그건 그저 로망의 도시 프라하가 자주 언급되어서였나. 아니면 프라하의 봄 같은 역사인 면에 반해 이유없는 연대감이 느껴서였을까. 있어보이는 저 제목 때문이었을까. 사실 나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데 좋은 책이라니, 부끄럽기도 하고 나의 과거의 선택이 달라졌는지 궁금해서 다시 꺼내들었다. 길어서 다 읽을 수 있을까 했는데 쉬지 않고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리고 책 앞장의 질문을 읽었을 때, 중간중간 멈칫거리며 문장을 되짚어보았을 때, 책장을 쉬지 않고 넘기다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때,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는 이 책이 변함없이 좋다.



우리의 인생이 매순간마다 무한한 횟수로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듯 영원성에 못박힌 꼴이다. 이런 발상은 끔찍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 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것을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한 것이고, 가벼움은 아름다운 것일까?

(중략)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이다.

pp.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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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첫 문장이자 책 전체를 꿰뚫는 내용은 결국 니체의 '영원한 회귀'에서 뿌리내린 것이다. 모든 것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내용은 곧 한번 사라지고 두번 다시 돌아오는 않는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내용이 된다. 어차피 아름답게 살든 잔혹하게 살든 사라지면 아무 무게도 없으니까. 그 전제대로 우리 인생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있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 말대로 가벼운 게 긍정적인 것이고 무거운게 부정적인 것이다. 어차피 반복될거라면 인생의 쳇바퀴에 몸을 맡기고 가볍게 사는게 피차 편하다. 오픈런하는 연극에 평생 고정출연하는 배우. 약간의 디테일 차이는 있어도 어차피 같은 내용으로 진행되는 극. 내일도 똑같은 태양이 뜨는데 고민거리가 없다.

  문제는 우리 인생은 한번뿐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인생은 '초벌그림'같다고 말한다. 근데 그 말도 좀 문제가 있다고도 한다. 초벌그림은 뭔가를 위한 밑그림인데 우리 인생은 그 밑그림조차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답게 살든 잔혹하게 살든, 어떤 결정을 내리는게 아주 의미가 있게 되니까. 파르메니데스 같은 이분법 선택지보다 맹자 선생님의 말씀만 익숙히 접하고 자란 동방예의지국의 후예는 현대의 결정장애라는 버릇까지 더해 '중간은 없나? 중용이 딱인데. 왜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는데 굳이 파르메니데스의 선택지에서 골라야 하나, 그리고 저렇게 일반화할 수 있는 문제인가', 그런 푸념을 했더랬다. 하지만 그래도 들었을 때 혹하는 질문 아닌가. 무거움과 가벼움, 무엇을 택할까? 중간이란 답도 좋지만 가벼움-무거움을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순이라며 이 긴 글을 써내린 작가의 질문에 응하고 싶어졌다. 물론 결론을 내렸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내리지 못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답은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내 인생을 어떤 무게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 무게가 어떻든 나는 내 인생을 꽤나 무겁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많은 부분 묵직함과 무거움을 좋아한다.

  이렇게 어렵고 골치아픈 질문으로 시작한다니 읽기도 전에 자칫 지루하고 무거운 소설이라고 겁먹었게 했다면 나의 잘못이다. 책도 그 무게를 조절하고 있는 듯하다. 서두는 니체의 영원회귀사상과 파르메니데스를 꺼내면서 질문을 던지지만 주된 분량은 테레사와 토마스, 사비나와 프란츠, 그리고 카레닌(매력적인 강아지)의 이야기이다. 몇 페이지 골치아팠다면 반가울 수도 있는 게 설정이 꽤나 흥미로운 막장이다. (한국식 아침드라마를 보았다면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을 정도) 이게 뭔가 싶을 수도 있지만, 그게 이 소설의 매력이다. 앞서 언급한 나의 친구는 이 설정에 대해서도 불편했던 것 같은데 나는 오히려 막장이라서 좋아했다. 현실에서의 막장이 소설에서는 매력적인 비틀림과 딜레마가 된다. 현실 속에서는 수많은 판단에 놓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미 작가가 내가 만든 주인공들 탄생비화도 말하고 등장하는 마당에 거리낄 것도 없다. 포인트는 각각의 인물들이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는 것이다. 누구의 이야기가 가장 와닿는지로 자신의 입장을 판단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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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라하의 봄> 중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주인공 테레사와 토마스의 관계만 보자면 테레사는 무겁고 토마스는 가볍다. 토마스는 애당초 누구 한 사람과만 평생 만날 수가 없는 '자발적 독신남'이다. 아내와도 그래서 헤어졌다. 수많은 여자친구들과 밤을 보낼 수 있지만 함께 아침을 맞이할 순 없다. 명망있는 외과의사이자 과학자인 토마스가 잠시 내려간 곳에서 웨이트리스로 만났던 테레사. 그가 전에 없이 갑자기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함께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역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는 테레사를 사랑하지만 그의 다른 여자친구들과의 만남을 끊을 수가 없다. 변명이겠지만 그의 여자친구들로부턴 테레사때문에 집중하지 못한다며 혼나고 있다니까.

  반면 테레사는 토마스만 보고 생전 모르는 프라하로 왔다. 그녀는 사랑하는 토마스에게서 나는 낯선 여자의 체취, 주고받은 서신에 절망하면서도 맞대응은 하지 못한다. 그녀는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묵직한 지고지순한 마음이 사라지면 그가 너무나 가볍게 떠나버릴까봐. 그녀는 참다참다 그녀의 바스라진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강아지 카레닌과 함께 토마스를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매번 토마스는 또 그녀를 찾아온다. 그녀에게도 유혹의 순간은 있었다. 아무래도 좋아질 쯤 토마스처럼 해보자 싶어 만나본 어느 엔지니어. 하지만 그 만남은 그녀에게 또다른 두려움과 공포를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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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라하의 봄> 중


  토마스의 가벼움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 예술가 사비나이다. 사비나는 이미 토마스 이외의 남자친구가 있는데 프란츠도 그 중 하나다. 토마스와 프란츠의 차이점이 있다면 토마스가 가볍게 거리낌없이 여자를 만나는데 비해 프란츠는 어느 정도 무거움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프란츠는 절대 자신의 집, 아내가 있는 제네바에서 사비나를 만나지 않는다. 가짜 학회 변명을 대면서 이 나라 저 나라로 밀회여행은 다닌다. 그 나름의 고문이자 원칙같은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는 아내 마리클로드에게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사실은 만나는 여자가 있다고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보다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던 아내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이제 무거운 의무에서 벗어나 사비나와 함께 하려 하지만 사비나는 영원히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프란츠는 대신 그녀를 종교처럼 보이지 않아도 사랑하며 그녀가 내려준 사랑인 것처럼 다른 어린 학생을 만난다.

    방황하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고 봐도 좋다. 하지만 이 있어보이는 제목을 대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무엇이 그렇게 참을 수 없도록 가벼운 존재인가? 첫번째 존재는 인간이다. 가벼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임감과 안정감, 일관된 마음이라는 무거운 짐이 싫어서 도망다닌다. 물론 혼자여서 오늘 외로움과 고통은 감내해야 한다. 무거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가벼움에 상처받으면서도 자신이 그들처럼 하는 건 더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 무거운 마음을 혼자 안고 견뎌버린다. 이걸 막장이라고 할텐가. 반드시 육체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지 않으면 그리 막장도 아니다. 우리도 크게는 두 부류 중에 하나 아니던가. 버리거나 버려질까 두려워하거나, 거리를 두거나 거리를 좁히려 애쓰며 버티거나.

  게다가 이 방황은 인간이란 존재에겐 필연적이다. 우선 우리는 같은 단어와 표현을 쓰지만 그 속의 상징과 의미는 다르기 때문이다. 평생 우리는 대화를 하고 행동을 하지만 그게 의도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가령 사비나에게 사랑이란 다소 폭력적일 수도 있는 강한 힘을 뜻하지만, 프란츠에게 사랑이란 지는 것이다. 그것이 둘의 이해할 수 없는 말 중 하나이고 좁혀지지 않는 간격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만들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잘못이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행동방식 혹은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존불가능성에 기인한다는 것을 통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기 때문이다. 

-pp.88

 

  작가는 사람의 인생을 악보에 비유한다. 그나마 어릴 때는 서로 확고하지 않은 부분들이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각자 확고한 악보가 생겨버려서 맞으면 만나고 안맞으면 말고 식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인생 곳곳에 놓여진 수많은 우연이 우리의 갈림길이 된다. 어떤 음악, 어떤 말, 어떤 만남. 그 우연이 새로운 테마로 자리잡고 발전한다. 모든 존재는 그래서 외롭도록 가벼운 존재일 것이다. 각자의 악보 속에서 평생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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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는 역사이다. 토마스와 사비나, 프란츠 세 인물의 역사 속 선택과 체코, 나아가 유럽의 역사와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체코는 소련의 지배하에 놓였던 시기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은 많은 사람들의 직업은 물론 생활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씨앗이 되기도 했다. 토마스는 사람 사이 관계에서는 가벼움을 추구했지만 자신의 신조를 지키는 면에서는 무거움을 택했다. 그는 그가 알뜰하게 쌓아온 커리어를 단 한 장의 글로 날려버렸다. 공산주의가 이럴 줄은 몰랐다면서 무지를 핑계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자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논란이 한창이었다. 그는 유명한 오이디푸스의 일화를 쓰며 몰랐는지를 알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책임질 일은 책임져야 한다는 글을 남겼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어머니와 동침했지만 책임을 느끼고 두 눈을 뽑고 테베를 떠났다. 물론 그가 그렇게 극단적인 주장은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글은 편집에 의해 본래 의도보다 짧고 강력하게 전달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여, 오이디푸스처럼 두 눈을 뽑고 체코를 떠나라' 정도 아니었을까. 그에게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직책을 유지할 것인지, 철회하지 않고 자리를 떠날 것인지 선택지만이 남아있었다. 모두가 그가 철회할 거라고 생각하는 그 상황에 현기증을 느끼며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는 전직 외과의사인 창문닦이 청소부가 되었다. 그가 엄청난 애국자여서는 아니었다. 테레사를 사랑하면서 내린 우연한 선택들 때문이었다. 그는 테레사때문에 취리히로 이민갔다가 다시 돌아왔던 상황이었다. 억울한 사람들을 석방해달라는 싸인을 하려다가 거절한 것은 다만 테레사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그의 명예의 무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는 신념에 있어서는 무거웠지만 결국 그 무게를 견디다 테레사의 요청에 따라 한적한 시골마을로 정착한다.

  사비나는 사람 사이든 자신의 신조든 역시 가벼움을 추구했다. 그녀는 사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났듯이 조국이 어떤 상태이든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다. 함께 간 망명인들이 체코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따지며 싸우는 그 마음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고통받고 있는 그녀의 조국때문에 그녀의 예술작품이 잘 팔리는 것 정도를 흐뭇해하면서도 그녀를 조국을 걱정하고 위하는 예술가로 표현하는 것에는 진절머리쳤다. 그런 선입견적 이미지에 갇히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싫어했던 건 공산주의 자체보다는 모든 것이 획일화된 전체주의였다.  그렇게 체코사람인 것도, 약력도 숨기고 나서 그녀는 다른 나라에서 자신의 예술활동을 계속해 나간다.

  그녀를 신적 존재로 사랑하는 옛 연인 프란츠는 이론적인 논의, 연구는 가벼이 여기고 갈등과 혼란, 그 현실 속에 참여하는 대장정을 무겁게 생각했다. 영원한 중립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가 사비나에게 반하고 만 건 그녀의 미모때문만은 아니다. 꾸준한 연구로 논문을 차곡차곡내지만 그는 그녀가 사는 체코의 그 갈등과 혼란에서 나타나는 짧은 글과 사진 한 장을 누구보다도 동경했다. 사실 그 현실에 참여한다는 것도 웃긴 해프닝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도 그는 열심히 참여해보았다. 막상 평화적 시위처럼 나가더니 총알이 날아드는 갈등이 두려워 그 앞에서 메아리만 치다 멈춰서 돌아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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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지평선의 신비>


  같은 역사인데 선택은 다르다. 목소리를 높여보다 침묵하고 숨어버린 토마스, 벗어나는 것에 집중했던 사비나, 그 역사의 현장 속에 어떻게해서든 참여해보고 싶었던 프란츠. 토마스가 애당초 그 글을 투고한 것, 철회서를 거절한 것 등의 선택이 잘 한 건지, 사비나가 도망간 게 잘한 건지, 프란츠가 사진 찍히는 데 급급한 어느 여배우와 우스꽝스럽게 캄보디아에서 행진을 한 게 잘한 건지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체코의 역사도, 유럽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도, 모든 역사가 그렇다. 한 귀족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한 행동으로 체코인이 몰살당한 30년 전쟁같은 한 국가 내의 역사는 물론, 서로 싸우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를 어찌저찌하다보니 판을 키웠던 1차 세계대전, 다신 전쟁은 없을 것처럼 하더니 뮌헨 회의로 자신의 나라를 독일 히틀러에게 바치고 이어진 2차 세계대전. 지금의 우리가 보면 어리석네 하겠지만, 당시의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내린 어리석은 결정도 우리가 깨닫기 쉽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역사는 '만약'이라는 질문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것이 작가에게는 역사를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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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 Clear Idea >


  작가는 자신이 던진 질문, 가벼움과 묵직함 중에 무엇을 택할까? 에 답을 이렇게  내려버렸다. 무엇을 택할까보다는 인생과 역사가 본질적으로 가벼운 존재라고, 가벼울 수 밖에 없다고. 한 번은 셀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개인의 인생이, 역사가 참을 수 없이 가볍다고 꼭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역설적으로 먼지처럼, 깃털처럼, 가벼운 인생, 가벼운 역사이기에 그 순간과 선택은 역설적으로 그 무엇보다도 무거울 수 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이 흐를 만큼 날아갈까 사라져버릴까 전전긍긍할 수도 있다. 한번이니까, 더 고민되는 거다. 멀리서 보면 가벼운데 나한테는 그래서 무거운 거다. 나비의 날개짓처럼 가벼운 결정이 엄청난 효과로 이어지는 예외적인 상황도 있을 것이다. 다만 갑자기 이렇게 가벼운 인생, 가벼운 역사라는 말이 안도감을 준다는 건 책을 읽으면서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 나야말로 가벼움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무거워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무거워할 필요까지는 없던 거였다고.

  작가는 사람을 네 부류로 정의했다. 대중의 무수한 시선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 다수의 친숙한 사람들의 시선이 필요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게 필요한 사람, 몽상가처럼 지금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사는 사람. 나를 종종 눌러왔던 무거운 무게는 저들 중 어떤 시선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작가가 말한대로 자신이 만든 이 서로 다른 캐릭터 역시 작가의 시선이 반영된 것은 아닌가. 처음 공산당을 열렬히 지지했다가 당에 대한 비판 끝에 추방당하고 프랑스로 망명해 침묵해온 그의 삶. 왠지 앞서 만난 등장인물들의 조각이 보이는 듯하다.(이것도 지루한 해석이려나.)

  한적한 시골생활에서조차 소련의 영향력 속에서 격리되고 억압되었지만, 테레사와 토마스가 그 때만큼 평화로운 순간이 있었을까 한다. 그들을 소중하게 연결해주었던 강아지 카레닌이 갑자기 죽게 되고, 그들은 건너 동네로 술도 마시고 춤도 추면서 즐기면서 이상한 슬픔과 이상한 행복을 느낀다. 돌아오는 다음 날 아침 그들이 자동차 사고로 한 날 한 시 세상을 떠날거라는 것은 모른 채 책의 마지막 장에는 그렇게 가볍게 즐거운 음악이 울려펴졌다.  막강했던 소련 역시 자신의 미래가 곧 어찌될지는 당시에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시니컬하게, 담담하게, 알 수 없어서 세상을 가볍다고 말하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가벼움을 말한만큼 그 글을 읽은 나에겐 글을 마칠 때까지 그만큼의 무거움이 느껴져서 그 모순이 너무나 아름다운 그런 책이다.  



- 이 리뷰는 문화의 소통을 강조하는 ART insight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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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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