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믿는 대로 볼 것인가, 보이는 대로 믿을 것인가? - 판타지 ‘판의 미로’ [시각예술]

글 입력 2016.10.08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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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필리아는 꿈이 많은 소녀다.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인 그녀는 동화책을 읽으며 공상에 빠지는 것을 즐겨한다. 새아버지와의 결혼을 위해 시골로 향하는 엄마를 따라나서지만 차가운 인상의 그가 소녀는 무섭다. 인간들이 모르는 지하왕국의 공주가 지상에서 기억을 잃고 살아간다는 동화의 얘기를 좋아하던 소녀의 앞에 요정과 판이 나타난다. 판은 오필리아를 지하왕국의 공주라고 하며 세 가지 과제를 제시한다. 마지막 과제는 판을 처음만난 집 뒤의 미로로 갓난아기인 소녀의 남동생을 데리고 가는 것. 소녀는 새아버지의 술에 약을 타고 동생을 들고 나오는 것에 성공한다. 약에 취한 채로 오필리아를 쫓던 새아버지는 미로 속에서 허공을 향해 얘기하는 소녀를 발견한다. 항상 꿈같은 소리만 중얼거리던 소녀. 새아버지는 소녀를 총으로 쏴버리고 소녀는 미로 속 우물 옆에서 쓰러진다. 쓰러진 오필리아의 눈앞이 밝아지며 남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신 엄마와 친아버지가 높다란 의자에 앉아있다. 성의 기둥 옆에서 판이 나오며 마지막 미션은 남이 아닌 자신의 피를 흘리며 희생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마침내 오필리아는 지하왕국의 공주로 돌아간다.


판의미로 포스터.jpg
 

 2006년 개봉된 ‘판의 미로’는 판타지, 드라마 장르로 분류되고 있는데,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판타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우리가 판타지에 갖고 있는 인상은 환상적인, 이미지가 예쁘고, 마법이나 기적 같은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에 의해 주인공의 소망이 성취되는 동화. 예쁜 요정과 주인공에게 길을 안내하는 듬직한 조력자, 평범하지만 알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며 영웅심리를 자극하는 신화적 분위기.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영화는 어둡고, 기괴하며 슬프다. 철부지 소녀인 오필리아를 주위 어른들은 예뻐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환상을 믿지 않는다. 소녀가 사랑하는 엄마마저 ‘마법은 없다’며 소녀를 꾸짖기도 한다. 요정은 벌레가 의태한 모습이고, 소녀에게 과제를 주는 판은 그녀의 편인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그녀를 몰아붙인다. 극 전반에 걸친 분위기는 화려한 색채로 재현해낸 기존의 판타지가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과 음침함이 가득한 잔혹동화의 세계에 더 가깝다.


오필리아와 아버지.jpg
 

 영화는 그 음울한 분위기의 판타지를 믿을 것인지 끈질기게 묻는다. 동화와 망상을 좋아하는 판타지에 한없이 가까운 소녀 오필리아와 반란군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냉정하고 잔인한, 현실에 가장 가까운 새아버지가 대조를 이룬다. 새아버지 뿐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어른들은 오필리아의 얘기를 그저 동화 속 얘기에 지나치게 이입해있는 어린 소녀의 망상으로 치부한다. 영화는 소녀와 다른 이들의 모습을 대비시키며 끈질기게 묻는다. 어느 쪽을 ‘믿을’ 것인지.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밤 소녀는 요정에 이끌리어 산이자, 땅이며, 숲인 판을 만난다. 판에게 받은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하며 그녀는 죽은 나무속에 사는 커다란 두꺼비를 만나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손에 눈이 달린 심판자도 만난다.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얘기하자 신비의 뿌리의 맨드레이크를 얻기도 했다. 마지막 순간 피를 흘리는 소녀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분명 소녀가 항상 흠모하던 세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눈에 소녀는 동화의 세계에 지나치게 잠겨있으며, 영문 모를 행동을 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당황시키기도 한다. 우유에 담긴 나무뿌리 같은 것을 엄마의 치료를 위한 약초라 우겼다. 갓난아기인 자신의 남동생을 납치해 미로를 헤맸고, 결국 새아버지의 총에 맞아 쓰러진 불쌍한 소녀일 뿐이다.


오필리아.jpg

 
 어떤 이야기를 믿고 싶은가? 이 영화의 결말은 어떤 것인가? 망상에 사로잡힌 소녀가 비정한 새아버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슬픈 이야기인가?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한 환상의 세계를 마침내 발견한 지하세계 공주의 이야기인가?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보이는 대로만 믿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본다’는 것은 이미 어떤 시각을 견지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것’은 객관적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어떤 것을 믿는 것이야 말로 지극히 주관적인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 하나의 폭력으로 번질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영화는 하나의 결말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저 이야기는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영화에서처럼 삶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에 부딪히고, 어떤 것을 믿을지 선택하는 연쇄 속에 살아간다. 타인을 믿고, 종교를 믿고, 어떤 사실을 믿고. 믿음을 공유하거나 다른 믿음을 나누거나, 설득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다만 바라는 것은 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의 시선에서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결말을 얻을 수 있기를. 지하세계로 돌아가 그리운 어머니를 만난 소녀처럼 내 이야기의 끝이 만족할 수 있는 결말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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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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