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차별과 구별 사이, 공존을 위해 6 - 장애인과의 공존 [문화전반]

글 입력 2016.09.2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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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8일부터 19일까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장애인 올림픽을 진행했다. 장애인 올림픽, ‘패럴림픽’은 1960년 17회 로마 하계 올림픽부터 시작되었다. 첫 올림픽 출전에도 불구하고 수영에서 3관왕을 차지한 조기성선수와 올림픽 후 안락사를 결심한 벨기에의 휠체어 스프린터 선수 마리케 베르보트 등 많은 감동과 고민을 동시에 안겨준 행사였다.


패럴림픽 해단식.jpg
 

 사회에서 장애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는 영화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말아톤’, ‘맨발의 기봉이’, ‘7번 방의 선물’ 등.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정도로 그 주제를 압축해 볼 수 있다.

1. 장애를 딛고 성공한 인간승리 → 감동
2. 장애로 인한 실패 → 연민, 사회 인식 개선 요구

 ‘말아톤’이나 ‘맨발의 기봉이’가 1의 시선을 충실히 담았다면, ‘7번 방의 선물’은 2로 인한 연민과 동정 사회의 자정을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지적장애인의 마라톤 완주 스토리를 담은 영화 ‘말아톤’의 한 대사를 기억한다.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

 
 영화의 주인공인 ‘초원(조승우 분)’은 동물의 왕국을 주로 시청하며 야생 동물을 좋아한다. 지하철에서 얼룩말 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를 보고 그 치마에 손을 대려다 여자의 애인에게 제지당한다. ‘초원’이 지적장애를 갖고 있음을 눈치 챈 남자는 큰 소리로 ‘초원’을 모욕하며 몰아세우는데, 그런 남자를 만류하는 초원의 엄마(김미숙 분)를 보며 ‘초원’은 소리친다.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 5살의 지능을 가진 20살의 청년이 지하철에서 소리친 저 대사가 장애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다. 그는 ‘장애’가 무엇인지 알고 소리쳤을까? 오직 자신만을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하는 엄마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사과하며 하던 말이었을 것이다. ‘초원’은 저 말의 의미를 몰랐겠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엄마에게, 다른 이들에게 오히려 화살처럼 박히는 말이었을 것이다.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


말아톤 지하철 스틸컷.png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

 국립국어원에서 정의하고 있는 장애의 개념이다. 나는 저 개념에 동의해 ‘장애인’의 반의어를 ‘비장애인’이라 부르자는 논의가 의아했다. ‘정상’이 아닌 사람을 ‘장애인’이라 칭한다면, 그 반대를 ‘정상인’으로 부르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었다. 내가 ‘정상’이라는 것에 대한 오만. ‘정상인’이라고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서는 어떤 상태가 ‘정상’인가에 대한 논의가 우선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수=정상’으로 규정하는 쉬운 길로 가려는 사고방식을 주로 견지하고 있다. 실제로 아직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는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상태다. 언어는 사회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그 분위기를 움직인다.  ‘정상인’과 ‘비장애인’은 입에 담을 때부터 그 분위기를 달리한다. 나의 무의식에 잠긴 차별을 경계하는 것이 언어를 통해 가능해진다.


 지하철역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포장마차에 장애인들이 모여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그 자리를 보며 문득, ‘저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받아야만 할 것 같은 사람들이 일탈을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한 것 같은 위화감. 내가 경계할 새도 없이, 내가 의식할 새도 없이 든 그 생각이 너무 부끄러워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나는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생각이 아닌 나만의 논리가 나에게는 있다고 자신하던 시절,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든 그 생각이 나를 무너뜨렸다. 장애인은 나와는 다른 사람일 뿐 내가 동정해야하는 대상이나, ‘비장애인’들에게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게 해주는 역할이 아니다. 그들은 그런 역할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태어나 살아갈 뿐이다. 나와 신체적, 정신적으로 다른 상태로 태어나 살아갈 뿐인 그들을 향해 어쭙잖은 연민의 시선을 던지는 것 또한 하나의 편견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늙어가면서 신체 기관이나 정신 능력이 ‘결함’을 가지게 되는 순간을 겪게 된다. 섣불리 누군가를 ‘정상인’, ‘장애인’이라 일컫는 것 또한 하나의 폭력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와는 다른 그 사람들을 존중할 수 있어야 공존의 사회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메인 이미지로 쓴 뉴욕에서 사용중인 새로운 장애인 마크와 그 마크를 디자인한 '사라 헨드렌'의 영상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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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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