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 나의 사랑 백남준 > - 타인의 삶

글 입력 2016.09.19 04:2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백남준-표지입체(고해상).jpg
 

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나와는 연관 없는 타인의 삶이 가슴 속에 흘러 들어와 먹먹하게 만들 때가 있다. 나의 사랑 백남준을 통해 바라본 구보타 시게코와 백남준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감정은 황당함과 놀라움을 지나 눈물을 끝으로 끝이 났다. 이들의 삶과 예술, 백남준을 향한 구보타 시게코의 한 없이 깊은 사랑의 감정을 따라가며 나의 감정도 오르락내리락 했다. 

백남준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내가 구보타 시게코에 대해 알리는 만무. 하지만 책은 친절하게도 그녀가 어떤 예술가였는지부터 설명해줘 호기심을 자극했다. 뉴욕을 대표하는 미술관이자 최초의 현대 미술관인 모마 미술관. 웬만한 작품은 거들떠도 안 본다는 이 도도한 미술관에 백남준의 작품과 함께 그녀의 작품이 전시될 만큼 그녀 또한 알아주는 예술가였다. 이런 그녀가 백남준에게 반하고 우연처럼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을 보면 뭐랄까. 아무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느낌이었다. 

어릴 때부터 반항아의 기질이 넘쳤던 구보타 시게코. 커서도 지루하고 따분한 커리큘럼 때문에 대학 교수와 언쟁을 벌이기도 하고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백남준 또한 무조 음악, 12음 기법을 창시한 쇤베르크와 현대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았으니 그들이 플럭서스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하게 된 것을 우연이라 말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1964년 일본에서 열린 백남준의 쇼에서 처음 만난다. 그 후 다시 미국에서 만난 두 사람은 플럭서스 운동을 펼치는 예술가이자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구보타 시게코의 성격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그녀는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사람을 연인으로 만들 만큼 적극적이었고 솔직했으며 기회를 만들 줄 아는 여성이었다. 그에 비해 백남준은 예술에 관한 선택을 제외하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대책 없을 정도로 돈 걱정 따윈 없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 그의 성격은 신선하고 파격적이며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예술과 꼭 닮았다. 

과격함마저 보이는 그의 초기 예술 작품 중에서도 내가 가장 의도를 파악할 수 없던 퍼포먼스가 있다. 버자이너 페인팅이라 불리는 액션 페인팅인데 어느 날 백남준은 시게코에서 이런 부탁을 한다. 

“시게코, 당신의 은밀한 곳에 붓을 꽂고 관객 앞에서 그림을 그려줄 수 있겠어?” 

퍼포먼스의 이름도 직설적이다. 버자이너 페인팅(Vagina painting). 직역하자면 질 그림이란 뜻이다. 억눌려 왔던 보지들에게 자유를. 보지를 보지라 마음껏 이야기하자. 뭐 이런 의미인 걸까. 백남준은 본인이 하고 싶지만 남자라서 안 된다며 이 퍼포먼스를 그녀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그게 왜 안 될까. 남자 성기에 붓 매달고 그림 그리는 건 안 되고 여자 성기에 붓 꽂고 그리는 건 된단 말인가? 나는 이 퍼포먼스를 페미니즘적인 시도로 여기는 의견들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이 부탁을 받아들였고 수치심을 느꼈다. 만약 그녀가 주디 시카고처럼 여성의 몸에 대한 편견과 해방을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벌인 일이었다면 페미니즘적인 시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보다 오히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라는 느낌이 좀 더 강하게 드는 퍼포먼스였다. 

백남준은 이처럼 가끔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박식함, 때로는 어린 아이 같이 천진난만한 모습, 손에 잡히지 않는 자유로움처럼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엔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 <다다익선>, <야곱의 사다리> 등 테크놀로지와 예술을 결합하고 거기에 동양적 사상과 성경의 이야기까지 더한 작품들. 그의 작품들을 보면 천재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이런 예술가와 함께 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인정받은 구보타 시게코 또한 얼마나 대단한 예술가인가. 책에는 그들이 처음 만나는 과정부터 비디오 아트 예술가로 유명해지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꽤 많이 담겨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가끔 인생에서 그런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오는 순간.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가난에서 벗어나 빛을 얻기 시작할 때, 백남준은 갑작스런 뇌졸중 증세로 쓰러져 왼쪽 몸 전체가 마비되고 만다. 그들이 날개 꺾인 새들처럼 병원에 갇혀 힘든 투병생활을 이어나가는 모습엔 눈물이 핑 돌았다. 환자도 미칠 노릇이었겠지만 24시간 내내 붙어 간병해야 했던 구보타 시게코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10년간의 간병인 생활로 창작활동이라곤 전혀 하지 못한 그녀. 남편이 때론 귀찮은 짐 덩어리 같을 법도 한데 그녀는 한결같은 사랑을 담아 그를 대한다. 아. 사랑이 뭔지. 그녀의 사랑은 너무나 먹먹했다. 

이들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느리게 읽어가며 책을 덮은 뒤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두 사람의 희로애락이 담긴 삶 전체가 가슴 속에 흘러 들어와 눈물이 되었다. 삶의 예술이고 예술이 삶이었던 구보타 시게코와 백남준. 나는 가만히 떠올려 본다. 두 사람이 야곱의 사다리를 건너 영원한 안식이 있는 곳에서 다시 만났을 모습을.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http://www.artinsight.co.kr)와 함께 합니다.


[장지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3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