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을 향한, 그러나 견디는 삶에 대하여 [문학]

글 입력 2016.09.18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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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한강 작가의 문체는 굉장히 섬세하고 몰입감이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녀가 그려내려 했던 이미지들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속도감 역시 문체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한없이 느리고 느린 순간, 급박한 그 순간이 문장을 통해 와닿았다. 채식주의자는 세 편으로 된 연작 소설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을 각각의 소제목으로 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시점도 변화한다. 이 시점에 따라 주인공을 크게 영혜의 남편, 처제, 영혜의 언니로 볼 수 있다. 이들의 평범했던 삶은 영혜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시작으로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간다. 안정적이던 가정도 모두 파괴되어 버리며 비이성과 그로테스크함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로테스크.jpg

 
1.
사건:
 
사건은 영혜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영혜는 핏덩어리들, 그녀가 누군가를 살해하거나 혹은 살해당하는 모습, 어떤 얼굴을 꿈에서 보곤 채식을 결심한다. 꿈을 꾸고 난 이후 그녀의 행동은 굉장히 비이성적이며 기이하다. 냉장고 앞에서 초점 없이 한참을 서있거나, 아침에 남편을 깨우지도 않고 냉장고에서 고기를 모두 꺼내어 버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심상치 않다. 남편을 비롯한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 그녀를 걱정한다. 그러나 그 걱정은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된다. 가족모임에서 그녀의 뺨을 때리고 억지로 탕수육을 입에 밀어 넣는 그녀의 아버지로 인해 영혜는 칼을 들어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이건 비극의 서막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남편은 ‘평범했기 때문에’ 결혼했던 영혜와 이별을 한다. 그는 종종 영혜의 언니인 인혜를 보며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고 했다. 외꺼풀에 광대가 튀어나오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영혜와 비교되는 짙은 쌍꺼풀에 서글서글한 외모, 성격을 가진 그녀를 보며 자신의 삶엔 없었던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다음 장인 ‘몽고반점’의 시선인 인혜의 남편은 영혜에게서 매력을 느낀다. 그것은 인혜로부터 영혜가 아직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이야기을 듣고 난 이후부터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부터 그는 영혜의 이전 모습들에서도 성적 매력을 다시금 느끼며 그의 비디오 아트에 그녀를 출연시키기로 결심한다.

그의 비디오 아트는 사뭇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는 그가 그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영혜를 만나 그녀의 맨몸에 꽃들을 그려 넣고 그것들을 비디오에 담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예술적 욕망과 성적 욕망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가 진정으로 담기를 원했던 것은 영혜 같은 여자와 어떤 남자가 성교를 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성욕을 비롯한 모든 욕망이 없는 영혜의 육체, 그런 젊은 여자의 육체와의 결합.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가 담아내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결국 스스로 영혜와 성교를 하고, 현장에서 그 비디오를 아내에게 발각 당한다. 이렇게 그들 부부 역시 다섯 살 난 아들을 둔 채 이혼하게 된다. 영혜는 이후 병원에 입원하고 식물이 되기를 꿈꾸기에 이른다.


2.
욕망 혹은 열망: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학교, 직업, 배우자, 모든 것에 대해. 그러나 항상 가보지 못한 길, 만나보지 못한 사람, 미지의 것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사는 모양이다. 또, 확신을 가지고 결정했어야 하는 문제에서 그러지 못한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평범함’을 우선시하여 영혜와 결혼한 영혜의 남편, 무언가 조금 부족한 것은 알았지만 인혜가 그런대로 완벽하고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인혜의 남편. 이들은 자신들이 타협할 만한 어떠한 것들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열망하고 있다. 그 열망, 혹은 욕망을 현실에서 실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열망하는 것은 어쩌면 보편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혜의 남편이 한 행동은 그저 불륜, 혹은 바람직하지 못한 욕망의 표출에 불과한 것일까. 모든 욕구가 배제된 듯 보이는, 어릴 적의 몽고반점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브래지어를 잘 하지 않고 자신의 나체를 내보이는 데에 스스럼이 없는 그녀를 그로 하여금 그렇게 욕망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눈에 형상화된 영혜는 마치 인간의 욕심과 허영, 속세의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진 순수의, 그리고 태초의 존재였을지 모른다. 그의 욕망의 결과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행동이었고 이혼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옳지 못한 행동임을 인지하고도 이끌리듯 그러한 행위를 자처한 그는 영혜에게서 사회적 규범과 인간적 가치를 넘어서는 태초의 존재를 보았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의 행동은 사회적 규범 안에서는 불륜이며 바람직하지 못한, 한 가정을 파국에 이르게 한 행위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가치에 대해서는 우리가 옳고그름을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3.
살아지는 것이 아닌, 견디는 삶:

‘나무 불꽃’은 인혜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영혜가 미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미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듯, 삶은 살아지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에게 특히 그러하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삶은 살아지는 게 아니다. 견디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살아가다가 문득 낯선 자신의 모습, 혹은 아주 가까운 사람의 낯선 모습을 목격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타자로 느껴지는 경험. 그것은 어쩌면 자기 부정의 경험이다. 영혜의 경우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그런 경험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것일 수도 있다. 평생을 들여 구축해 왔던 세계의 부정, 그것은 그로테스크하고도 필연적인 경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능에는 삶에의 본능, 죽음에의 본능이 있다. 삶에의 본능은 ‘에로스’로, 죽음에의 본능은 ‘타나토스’로 일컬어진다. 우리는 우리의 본능이 죽음을 향하는 순간, 삶에의 본능을 통해 그것을 상쇄시키곤 한다. 영혜의 모습이야 말로 극단적인 죽음에의 본능이 발현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인혜의 경우 죽음에의 본능은 현실적인 자극과 책임감에 의해 상쇄된다. 인혜 역시 영혜처럼 그녀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죽음에의 충동을 느끼는 순간들이 오지만, 아들에 대한 책임감과 그녀 자신에 대한 여러 문제들로 다시금 삶에의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영혜’처럼 삶을 유지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너무 많은 것을 강요받고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나날들에 우리는 죽음에의 본능, 타나토스를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삶에의 충동 역시 그만큼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이 두 본능이 서로를 상쇄시킬 때 우리는 삶을 ‘견뎌’낸다.


[노혜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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