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추석맞이, '딸바보'문화 속 우리는 [문화 전반]

글 입력 2016.09.1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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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같으면 책이나 웹툰, 그리고 리뷰를 할겸 자기 만족겸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를 소개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갑자기 문득 최근 몇 년간의 변화가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건 오늘이 추석이기 때문인지도. 그러고 보니 이제 벌써 익숙해졌다, '딸바보'라는 말. 아들보다 딸을 더 바라게 되었다는 생각이 묻어나는 그 표현이 아직은 내게 늘 놀랍기만 하다. 말뿐만은 아니다. 2013-2014 남아출생성비가 105 정도로 역대급으로 낮아졌다는 건, 남아들이 덜 태어나서라기보단 여아들이 예전보다 많이 태어나서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직도 셋째 이상으로는 조금 비정상적으로 남아성비가 높다곤 하지만 둘째는 오히려 남아성비가 조금 더 낮은 편이며, 1980년대 이후로 측정해온 성비가 103-107의 '자연스러운' 정상 성비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특히 1990년대의 116.5 같은 놀라운 수치와 비교하면!) 표현만 생긴게 아니라 주변에서도 딸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모습도 보았고, 이렇게 수치까지 보았는데도 아직 잘 조심스럽다. 정말 이제 딸을 좋아하게 된 시대가 된 게, 문화가 자리잡은 게 맞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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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에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이 아내에게는 쫓겨날 수도 있는 칠거지악이었고, 또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로 갈수록 아들, 그 중에서도 장자를 우선시하는 문화는 더욱 깊이 자리잡았다. 사실 딸만 낳게 되고 아들을 낳지 못했던 건 엄밀히 말하면 아내의 탓이라고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들이 생기는 유전자는 남편이 결정해주는 것이기도 하니까. 앞서 1990년대 여자와 남자 아이 성비가 비정상적으로 불균등했던 건 태어나지도 못하고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스러진 생명이 많이 숨어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아들들에게 한소리하려는 것은 아니다. 딸들이 서운하고 야속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아들들은 또 잔뜩 어깨에 놓인 의무와 관습 때문에 힘겨워해야 했다. 강인한 이미지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같은 것은 모두에게 꼭 맞는 옷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남자나 여자나 결국은 모두 그 시대 문화의 피해자인 건 마찬가지이다. 요즘은 덜 해서 다행이다. 빈말이라도 딸이 더 좋다는 말, 내게는 울림이 크다. 딸같은 아들, 아들같은 딸 호환이 되는 느낌이기도 하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태어나게 해달라고 해서 인생이 시작되는 건 아니다. 내가 살 곳, 가족들, 나의 성별과 어느 정도의 능력은 처음부터 세팅이 되어있다. 그 설정값은 쉽게 변하는 것도 아닌데 그 무게는 반드시 짊어지게 되어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말도 맞다. 우리는 주인공으로서의 설정값을 묵묵히 견디면서 인생이라는 시간과 무대 속에서 이야기를 펼치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야기는 끝나고 만다.



   어느 집 큰 아들에겐 딸이 둘이나 있었다. 주변 친척들은 더 늦기 전에 한번 더 아이를 가져서 이번에는 아들 한 번 보자고 부추겨댔다. 그의 어머니는 며느리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볼 수 없다면 마음으로는 밖에서 낳아오기라도 해도 괜찮다는 심정이었다. 큰 아들과 그의 아내는 10년만에 큰 맘먹고 아이를 낳기로 했다. 하지만 왠지 뱃속에 있을 때는 느낌이 아들인 것만 같았는데 낳고 보니 또 딸이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그의 동생은 똑같이 딸이 둘인데 느즈막히 셋째로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은 더더욱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채 100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아내는 노산으로 아이를 낳은 탓에 잔뜩 부은 몸으로 동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지어왔다. 그녀라고 상황이 즐거운 건 더더욱 아니었다. 작은집에서는 셋째로 아들을 낳았다면서 큰 아들과 그의 아내에게 자랑을 해댔다. 큰 아들은 계속 술을 달고 살다가 하루는 직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의사는 그의 사정을 듣더니 아이가 팔다리는 멀쩡하게 있는지 문제는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가 멀쩡하고 문제는 없다고 하니 의사는 그럼 다행이고 됐다고 했다. 물론 그에겐 그냥 다행이고 괜찮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러더니 의사는 지나가는 소리로 '아들씨가 없나보네요'라는 말을 했는데 큰 아들은 갑자기 번뜩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한번도 그렇게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인건지 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유독 좋아했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울다가도 아버지가 돌아오면 싱글벙글 방긋방긋 웃어보이곤 했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처음 태어났을 때보다는 훨씬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아이를 좋아해주었다.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그의 아버지와 조부모님을 여전히 비슷하게 좋아라 했지만 마음 속에선 이미 예전과는 다른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걸. 아이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를 우연히 전해들었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축복받지 못한 아이', '사랑은커녕 원하지도 않던 아이', 혹은 '실패작'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살아야 할 방법에 대해서도 역시 깨닫게 되었다. 결국은 어른들이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능력이나, 성격면에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세상에 불러낸 아이를 다시 달가워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사는 건 쉽지 않구나. 인생은 나이와 상관없이 무겁구나, 아이는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세상은 누구나 존재 자체로도 아름답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말을 하지만, 자신에게는 어쩌면 좀 덜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아이는 딸 이어도 아들 그 이상의 몫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른이 되었다. 그녀는 지금도 가끔은 문득 자신을 좋아해주지 않았던 가족들을 야속해하는 마음이 덜컥 올라오는 날엔 괴로워하기도 한다. 늘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고 스스로를 진정시키곤 한다. 차라리 그 이야기를 알지 못했으면 싶다가도, 알지 못하고 있었으면 더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을 거란 생각도 한다. 그녀는 깊은 곳 어딘가는 늘 자신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숨겨두었다. 하지만 점점 그 형체도 이유도 뚜렷하게 보이고 있어서 오히려 스스로가 안쓰럽곤 하다. 그녀는 궁금하다. 사실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자신을 좋아해주는 존재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까스라미처럼 그녀를 따라다닌다.



   이런 사람의 이런 인생도 있다. 당신의 인생이자 나의 인생, 혹은 어디서 들어본 누군가의 인생일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마 비슷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녀가 아들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결론지을까? 앞으로 그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계속 고통받을까? 이 사람이 안타까운가? 이 사람만 안타까운가? 잘못이 있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누군가만의 잘못인가?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안타깝다. 모두의 잘못이면서도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 문화라는 게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보아도 절절하게 무섭다. 그 시대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한 사람에게 각인처럼 기억을 남기고, 그 사람이 다음 세대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생각해보면 무시할 수가 없다. 문화는 기술보다도 느리게 변화하기에 어떤 문화가 바뀌기 전까지 그  문화로 인한 수혜자와 희생자는 필연적이다. 이렇게 성별, 가족환경, 시대라는 설정값 내에서 고통받는 것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깨어있는 주인공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그런 마음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서 '아들바보'보다 잘나가는 '딸바보'라는 표현, 여아선호현상, 혹은 그냥 둘다 좋은 현상이 문화로 자리잡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 이렇게까지 변하는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걸 보고 듣고, 느끼는 입장에서는 어쩌면 이렇게도 변하지 싶을정도로. 남아선호사상, 아들선호문화에서 살아왔던 모든 사람들을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 싶다. (물론 아예 한 명만 낳기도 벅찬 느낌으로 둘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유는 또 깊이 들어가면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족과 보름달을 함께 하며 명절 추석을 보내고 있으실 모든 분들은 또 다른 한국의 작은 명절 문화들에서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할 것이다.  제사 및 명절준비에서 시작되는 남녀간의 불평등 논란부터 결혼,군대,연애,취업 등 안부라는 명목으로 감정의 생채기를 내는 공포의 안부인사, 나의 잘남을 뽐내기 위해 주변의 모자람을 영양분으로 삼으며 자기 이야기만 하기 바쁜 일방향적 독설 및 소통 등, 많기도 하다. 즐거운 명절이 될 지같은 크고 작은 우리의 문화의 흐름이 흥미로우시다면 우선 한 가지는 기억하시라, 우리는 설정값은 정해져 있지만 많은 것을 바꿔나갈 수 있는 영향력있는 멋진 주인공들이라는 걸. 


- 이 오피니언은 문화의 소통을 강조하는 'ART insight'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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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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