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누추하되 유서깊은 음악도시, 리버풀

글 입력 2016.09.08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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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추하되 유서깊은 음악도시, 리버풀


글 - 김승열 (음악칼럼니스트)



지난 5월 17일 화요일 오전, 나는 런던 유스턴역에서 리버풀로 향하는 기차의 객실에 앉아 있었다. 목적은 단 하나, 난생 처음 찾는 영국의 항구도시 리버풀에서 음악회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대서양과 면한 잉글랜드 중서부의 항구도시 리버풀에는 특별한 오케스트라가 176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바로 1840년에 창단된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그것이다.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존립해 오던 동악단은 1957년 지금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의해 로열이라는 왕립 칭호를 하사받았다. 이후 영국 왕실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200년 역사를 향해 순항중인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를 그러나 나는 당일 목도할 수 없었다. 그 날 저녁 리버풀 필하모닉홀에는 로열 리버풀 필이 아닌 악동 바이올리니스트 나이젤 케네디의 연주회가 잡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케네디의 익사이팅한 콘서트를 관람하는 것으로 로열 리버풀 필의 연주회를 못 본 아쉬움을 달랬다.



- 낡은 콘서트홀에서 경험한 케네디의 기상천외한 무대


1933년 기존의 리버풀 필하모닉홀이 화재로 전소되자 지금의 새로운 리버풀 필하모닉홀이 1939년 개관했다. 올해로 77년의 입지를 다져오는 동안 리버풀 필하모닉홀의 면모는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퇴락한 감이 짙다. 2015년에 진행된 리노베이션에도 이 연주회장의 외부와 객석풍경은 낡아빠진 퇴락함 그 자체였다. 여기에 객석을 점령하고 있는 리버풀 시민들의 행색 또한 일상의 고단함을 머금은 노동자들과 서민들 일색이었다. 지금껏 방문해본 유럽의 연주회장들 중 가장 허름한 건물과 객석풍경이었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하리. 2005년 10월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대면한지 11년 만인 이 날 리버풀에서 해후한 환갑의 나이젤 케네디의 운궁은 극한으로 치닫는 비르투오시티의 결정체였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이들 퇴락한 건물과 누추한 객석풍경이 감싸고 도는 무대의 퀄리티는 최상급 그 자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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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필하모닉홀 정면 / © Mark McNulty
 

이 날 다시금 절감했지만 호화찬란한 연주회장과 화려한 객석행렬은 연주회의 품질을 가늠케 하는 필수조건일 수 없는 것이다. 건물과 사람이 퇴락하고 초라할지언정 무대 위에 꽃피는 연주회의 퀄리티가 최상급이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이런 음악 외적인 문제로 클래식/오페라 공연에 가길 꺼리는 한국인들도 상당수 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핵심은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 자체인 것이다. 자신의 행색이 어떻든, 자신의 고전음악에 대한 소양이 어떻든 음악을 진지하게 감상할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주눅들지 말고 연주회장으로 향할 일이다. 음악을 향한 진지한 순도 높은 열정이 이런 음악 외적인 잡다한 문제들을 일거에 날려버릴 것이므로. 나는 캐주얼한 차림으로, 심지어는 꾀죄죄한 행색으로 리버풀 필하모닉홀에 앉아 있는 상당수 리버풀 시민들을 바라보며 이 같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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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필하모닉홀 무대와 객석 / © Mark McNulty
 

이 날 나이젤 케네디는 자신이 조직한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인 오케스트라 오브 라이프와 몇 명의 밴드 멤버들과 함께 했다. 연주회의 타이틀은 ‘새로운 사계’와 ‘헌정’!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에 적나라한 애드립을 가미한 나이젤 케네디식 ‘새로운 사계’와 작고한 선배 바이올리니스트인 스테판 그라펠리와 아이작 스턴 등에게 헌정하는 형식의 크로스오버 무대가 펼쳐졌다. 환갑의 나이에도 펑크머리로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객석과 교감하는 케네디의 기상천외한 무대매너는 줄곧 관객의 폭소를 자아냈다. 그러나 그가 연주에 몰입해서 완벽한 보잉으로 곡들을 일사불란하게 요리해 가는 프로페셔널한 면모에는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이라는 수사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너무도 강직하고 탄탄한 연주였던 것이다. 국내의 유수 현악 연주자들이 오십줄만 넘기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매너리즘으로 가득한 맥이 풀린 연주를 들려주는 풍경에 비한다면, 환갑임에도 케네디가 선사한 비르투오시티의 극한은 가히 신의 경지였던 것이다. 우러러 볼 수 밖에 없는 케네디만의 장인정신이었다. 그는 비록 무대 위의 악동이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지만 연주에 있어서만은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진정한 비르투오소였다.



- 바실리 페트렌코와 로열 리버풀 필의 황금시대


이런 연유로 나는 기왕 리버풀까지 가서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관람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상쇄시킬 수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로열 리버풀 필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2006년부터 동악단의 수석지휘자로 있는 러시아의 바실리 페트렌코(1976- )는 11년째 리버풀의 음악문화를 책임지고 있다. 그가 부임한 후 리버풀의 클래식관객은 몰라보게 젊어졌고, 그 덕분에 로열 리버풀 필은 전대미문의 도전적인 자세를 견지해 오고 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5년에 걸쳐 완성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5곡 전집은 평단의 극찬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과거 로열 리버풀 필의 수장들이었던 말콤 서전트와 파울 클레츠키, 에프렘 쿠르츠, 존 프리처드, 찰스 그로브스, 발터 벨러, 마레크 야노프스키, 리보르 페세크, 페트르 알트리히터, 제라드 슈바르츠 시절에 비해서도 지금의 페트렌코 시대는 진정한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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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필하모닉홀에서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바실리 페트렌코
/ © Mark McNulty


비록 로열 리버풀 필의 콘서트는 본 적이 없지만, 바실리 페트렌코의 지휘는 두 번 목격한 적이 있다. 2010년 9월과 2011년 11월 두 차례에 걸쳐 나는 파리에서 페트렌코의 명지휘를 목도했었다. 2010년 9월말 파리 오페라 바스티유에서 페트렌코는 차이코프스키의 ‘예프게니 오네긴’을 확신에 찬 세밀한 비팅으로 끌고 가 폭풍 같은 갈채를 이끌어 냈다. 특히 1막의 저 유명한 타티아나의 연서장면에서 페트렌코가 파리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상대로 이끌어낸 소노리티는 시릴 대로 시린 미세한 음줄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눈이 시리고 귀도 시린 음의 세밀화를 감상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1년 여가 흐른 2011년 11월말 파리 살 플레이엘에 페트렌코는 북유럽 최고의 악단인 노르웨이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등장했다. 파리를 경유한 당시의 유럽투어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덕분에 페트렌코는 2013년 가을부터 오슬로 필의 수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그가 조슈아 벨 협연으로 풀어낸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은 백열과 적열의 도가니를 수시로 오가는 짜릿한 쾌감을 선사했다.


리버풀 필하모닉홀에서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마치고 커튼콜에 응하는 바실리 페트렌코.jpg
리버풀 필하모닉홀에서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마치고 커튼콜에 응하는 바실리 페트렌코
/ © Mark McNulty


새로운 러시아 명지휘자 시대가 도래했음을 바실리 페트렌코의 지휘무대를 통해 직감할 수 있었다. 2018년 가을 래틀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 7대 수석지휘자에 취임하는 키릴 페트렌코와 툴루즈 국립 카피톨 오케스트라/베를린 도이치 심포니/볼쇼이 극장 3자를 총괄하는 지휘계의 기린아 투간 소키예프 및 런던 필의 수장으로 있는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와 더불어 로열 리버풀 필/오슬로 필의 터줏대감 바실리 페트렌코는 러시아의 지휘광맥 빅4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중 누가 가장 앞서 나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 경합의 최종 승자는 아마도 이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빅4의 연륜이 60을 넘긴 후반부에나 판가름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들 라이벌의 흥미진진한 격전을 관전할 수 있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우리들 불특정 다수의 관객들이다. 야심한 밤 리버풀 필하모닉홀을 빠져나와 리버풀의 항만을 거닐며 나는 이 같은 사념에 빠졌다. 아울러 로열 리버풀 필이 머지 않은 미래에 한국을 첫 방문해 주기를 진심으로 염원해 보았다.





김승열 (음악칼럼니스트)

-고전음악칼럼니스트.

월간 클래식음악잡지 <코다>,<안단테>,<프리뷰+>,<아이무지카>,<월간 음악세계> 및
예술의전당 월간지 [Beautiful Life],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계간지 <아트인천>,
무크지 <아르스비테> 등에 기고했다.

파리에 5년 남짓 유학하면서 클래식/오페라 거장들의 무대를 수백편 관람한 고전음악 마니아다.

저서로는 <거장들의 유럽 클래식 무대>(2013/투티)가 있다.
현재 공공기관과 음악관련기관, 백화점 등지에서 클래식/오페라 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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