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간을 뛰어넘는 벗이자 스승님, 가을같은 책 < 책만 보는 바보 > [문학]

글 입력 2016.09.0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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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저녁 바람이 시원서늘해졌다. 물론 후덥지근했던 이번 주말은 나름의 예외지만. 더위가 정말 지겨워지던 참에 바람 한 결이 달라지면서 옷차림도, 표정도, 생각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신기하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꽃이 피고 날씨가 따뜻해지는 봄이 가장 설레는 계절이겠지만 나는 가을이 한 해 중에 가장 설레는 때다. 적당히 서늘한 바람, 울긋불긋 눈이 즐거운 단풍들, 서걱서걱 발끝에 채이는 낙엽소리까지, 복잡하고 뜨거운 마음을 잔잔하게 다독여주는 그 시원함에 몽글몽글 나른함마저 피어오르는, 설레고 매력적인 가을.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가을이듯이, 내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 중에 이 책, <책만 읽는 바보>도 내게 '가을 같아서'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난 이 책은 따뜻한 벗이자 스승님이 되었다. 시험공부 빼고는 모든 것이 다 재미있다는 시험기간에도 단숨에 읽어내리고 했고, 그 문구가 좋아서 한번씩 찬찬히 되뇌어보기도 했고, 마음이 복잡할 때나 오랜만에 책장을 넘겨보고 싶을 때 어렵지 않게 손이 저절로 찾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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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주인공은 조선시대 후기 청장관 이덕무이다. 국사책에서는 그가 정조 시대의 사람이며 <청장관전서>, <아정유고>를 남겼다는 간단한 내용만 남아있을 뿐이라 달달 외우거나 넘어가기 마련인 사소한 사람으로 남아있겠지만 절대 그는 사소하지 않다.  정조가 그의 시를 보고 우아(雅)하다고 평하여 청장관이라는 호 대신 말년에 아정(雅亭)으로 호를 바꾸게 되었고 사후에 정조의 명 하에 그의 작품들이 '아정유고'(雅亭遺稿)라는 이름으로 나오게 되었다니, 그의 시가 얼마나 우아했을지 궁금해지기까지 하다.

  책만 보는 바보(간서치)는 자조적이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한 별명이다. 좋은 뜻에서든 나쁜 뜻에서는 세상에 나왔으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성공이라 하던 조선시대였다. (사실 지금도 그리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이덕무가 책만 읽는 바보라는 어리숙한 이미지의 별명을 갖게 된 건 그가 책을 좋아해서도 있지만 사회제도 때문이기도 하다. 왕족 계열이지만 서자여서 장사도 하지 못하고, 벼슬도 갖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인 그는 때로 간서치라는 별명에 무너지곤 했을 것이다. 돈 한 푼 벌지 못해 식솔들의 배나 굶주리게 하는 그 괴로움으로 소중한 책을 팔아 먹고 살 돈을 마련하던 그, 맹자께서도 자신을 이해해주셨으리라 허탈히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따스한 느낌이 드는 건 그가 책과 학문을 대하는 그 풋풋하고 순수한 마음 때문이다. 동네 책이란 책은 이덕무를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혼자 책을 보다 막히면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끙끙거리다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에 신이 나서 소리를 치고 다닌다던 그. 책은 추위와 배고픔, 가난과 외로움마저 버틸 수 있게 하는 존재였다. 그가 말한 '책읽기의 이로움'을 보면 그의 마음이 드러난다.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자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둘째,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 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의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p.24, 첫번째 이야기 나는 책만 보는 바보



  무엇을 그렇게 끙끙 앓을 만큼 의미를 알고 싶어 애태웠던 적이 있던가. 가끔 실마리가 풀려서 찾아오는 기쁨에 몸서리를 쳐본 적이 있는가. 외롭고 쓸쓸한 순간에도 '너밖에 없다' 싶던 존재가 있던가. 순박한 간서치 이덕무는 그만큼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질문을 던져주고 나는 매번 같은 구절에서 멈칫멈칫 하고야 만다. 나는 정말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았다고 할 수 있는 순간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머리 속에 많은 내용을 집어 넣었다가 시험기간에만 와르르 쏟아내고 다시 지웠던 경우가 훨씬 많은게 사실이지만 지금은 모르는 것이 풀렸을 때의 그 기쁨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의 글을 보고 나서의 반가움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을 만나게 되었을 때의 낯선 매력을 느껴본 손에 꼽는 기억들을 우선 간직하기로 했다. 거의 평생이라면 평생 공부만 해온 셈인데 막상 공부, 책, 학문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이렇게 작고 부끄러울 수 밖에 없다.

  간서치 이덕무는 벗에 있어서도 따뜻한 질문을 던져준다. 이덕무는 들어보지 못했다하더라도 그의 벗들을 보면 익숙하며 후덜덜한 조선 후기 실학파 인맥이 가득하다. 재치있는 풍자의 대가 연암 박지원, 지구가 둥글다며 전파하고 다녔던 담헌 홍대용, 날카로운 시선으로 중국에게 배울 건 배우자며 <북학의>를 저술하고 상업과 수레를 강조했던 개혁가 스타일 박제가, 우리의 잊혀진 발해의 역사를 담아낸 유득공, 이덕무의 처남이자 뛰어난 무술로 정조 시대 <문예도보통지> 제작에 기여한 백동수까지. 서로 모여 책을 읽고 음악을 연주하고, 신세 한탄도 하며 술도 기울이고, 서로 다른 성격과 재능의 소유자들이 오래오래 인연을 함께 한다. 참 부럽기도 하고 행복한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기도 하고, 또 나는 어떤가 싶어지는 순간.



길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그는 비로소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오게 된다. 
좀 더 마음을 기울이면 그가 살아온 이야기, 그의 가슴속에 담은 생각들을 알게 된다. 더욱더 마음을 기울이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벗이 되리라. 박제가와 나처럼. 우리와 다른 벗들처럼.

-p.75 세번째 이야기 내 마음의 벗들 중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에게도 오래오래 만나는 친구가 생기는 게 인생의 목표로 자리잡은 게. 일단은 10년을 먼저 기준으로 잡아놓았다. 나에게도 우선은 10년, 20년 이상 함께 한 친구가 있다면 나는 그리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다행히 내년이면 10년이 되는 친구가 둘이나 있다. 나머지는 또 차곡차곡 연차를 쌓아가는 사이도 있고.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그 긴 시간동안 끈을 놓지 않고 마음을 기울이고 이해하려는 그 노력이 중요한 것일테다. 이따금 생각하곤 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엔 어떤 이들이 내 마음의 벗들로 남아있을 것이며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벗으로 남아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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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벗의 중요성을 따뜻하게 전달한 울림있는 이덕무의 생각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공감할 부분이 많지만 안타깝게도 이덕무의 바람이 모두 꼭 들어맞지는 않았다. 지구가 둥그니까 어느 곳이 위고 아래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담헌 홍대용의 말에 과연 정말 세상의 중심과 변두리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자신의 삶에서는 모두 스스로가 중심이라면서 그는 그의 후손들이 조상들보다는 덜 탄식하고 분노하면서 더 푸른 미래가 있길 마음 가득 기원했다. 하지만 과거와 다른 이유로 지금은 또 지금대로 그의 후손들은 탄식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면 지금은 중국 대신 '선진국'이라는 이름 하의 서구권 국가들이 세상의 중심이다. 중국의 학문, 중국의 문화를 따라하던 조선시대 마냥, 선진국의 학문, 선진국의 문화를 좇기 바쁜 나날 역시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조선 시대에 비한다면 신분 같은 이유 때문에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가 더욱 자유롭게 중심이 되는데 제약이 없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굴레와 장애물들이 신분 아닌 신분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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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의 탓으로 돌리려는 것도, 어차피 달라진 것은 없다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달라진 것들이 있고 부족한 점들은 노력하고 노력할 뿐인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완벽한 세상은 아니었으니까. 나아질 건 나아지고 새롭게 생기는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그와 같이 좋은 옛날 사람이 우리에게 가득 응원하는 마음을 전해주기에 덜 무섭고 좀 더 든든한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제는 오래되어 노랗게 바랜 이 책을 꺼내는 매 순간이 그렇다. 잘 잊어버리고 말아서 다시 한번 한동안 잊지 않으려고 자꾸자꾸 꺼내곤 한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어도 나에게는 이미 멋진 스승님이자 벗이기에.



시간을 나눈다는 것은,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옛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들의 시간을 나누어 받기도 한다. 옛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이 오롯이 담겨있는 책들, 그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산과 들을. 내 안에 스며 있는 그 시간들을 느낄 때면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을 수 있었을까, 나라면 그 순간 이런 마음이었을 텐데 하며. 겪어 보지 못한 아득한 옛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샘솟듯 흘러나오는 건, 내 안에 이미 그 시간이 스며든 까닭일 것이다.

(중략)

저 아이들과 우리 또한, 서로의 시간을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노력이 저 아이들의 시대를 조금이나마 빛나게 하고, 그런 우리의 시대를 저 아이들이 기억한다면.
그보다 더 먼 훗날의 사람들과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와 나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나눌 수 있다. 옛사람과 우리가, 우리와 먼 훗날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나누며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함께하는 벗이 되리라.

-pp.249-250 아이들이 열어갈 조선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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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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