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록의 필연성과 불완전성에 대하여 [문화전반]

글 입력 2016.08.2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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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하기 위해 노력한다. 조선시대에는 사관을 두어 역사를 기록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역시 인간의 삶은 다양한 형태로 기록되고 있다. 소설가 최시한은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이며 이야기 능력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 능력’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스토리텔링이 각광받는 것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려 하는 본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야기 본능은 나아가 인간으로 하여금 개인의 일, 혹은 타인의 일을 기록하도록 한다. 기록을 통해 이야기는 더욱 광범위하게 전해지게 된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국가적 차원의 중대한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은 오늘날 기록되고, 이야기되고 있다. 언론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날 있었던 일들을 리포트 한다. 이는 오늘날 권리로 인정받는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기도 한다. 개인은 그 날 있었던 일들을 가족 혹은 친구에게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의 본능을 해소한다. 이러한 본능이 인간을 사회적 존재이게 하는 데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영화 ‘터널’을 보았다. 이 영화는 터널이 붕괴된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의 인물들의 행동방식과 심리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대한민국의 안전이 또 한 번 무너졌습니다’라는 앵커의 대사를 시작으로 재난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모습이 점점 드러난다. 영화 초반에는 신축한 터널이 무너진 재난 상황에서 터널 속에 갇힌 정수(하정우)를 구하기 위한 대규모 구조작업이 이루어진다. 정부 인사들은 사건 현장을 찾아 피해자의 가족(배두나)과 계속해서 사진을 찍는다. 언론사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구조작업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면서까지 취재를 한다. 그러나 구조 작업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자 생사도 확인되지 않는 한 사람을 위해 너무 많은 비용이 투입되고 있다며 구조작업을 중지하라는 여론이 형성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조작업 중 인명 피해가 발생하자 터널 붕괴 피해자의 가족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계속되는 회유와 압박, 정신적 스트레스 속에서 세현(배두나)는 결국 구조작업 포기 서명을 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구조대장 대경(오달수) 덕분에 결국 정수(하정우)는 구출되지만 응급실로 이송되는 환자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 붓는 언론과 인증샷을 찍으려 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상황은 몇 년 전 우리 사회에 큰 아픔과 충격을 안겨준 세월호 사건과 유사해 보인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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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비인간적 행태를 보이는 ‘언론’도, 그러한 것들을 묘사하는 영화 자체도 무언가 이야기하고 기록하려 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언론사의 보도는 팩트만을 담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는가. 과연, ‘팩트’란 무엇인가. 재난 상황 앞에서의 한국의 실태를 고발하려 한 감독의 영화는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가. 모두가 그가 묘사하는 현실에 공감할 수 있는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의 기사로, 혹은 한 편의 영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하나의 사건에는 한 가지의 단면만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세상의 일은 차치하고 하나의 사건에서조차 진실과 거짓은 불분명하다. 또한 그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현실세계에서 뚜렷하지도 않다. 누군가에게 악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선이 되며, 누군가에게 선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악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관점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김연수는 그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끊임없이 재현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리 현실을 재현하려고 노력해도 ‘기록’은 현실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집에 실린 단편 소설 ‘뿌넝숴’의 화자는 6·25전쟁에 참전했던 중국군이다. 그는 ‘사실 전쟁은 재미있지만, 전쟁이야기는 재미없어.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니까.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라고 말하며 직접 체험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하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또한,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어 있는 게 아니야. 인간의 역사는 몸에 기록되는 거야. 그것만이 진짜야. 떨리는 몸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말해주는 게 바로 역사야.’, ‘몸소 역사를 겪어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뿌넝숴라고 말해도, 역사를 만드는 자들은 거기에다가 논리를 적용해 앞뒤를 대충 짜맞추고는 한 편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라고 말하며 역사 기록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는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즉, 아무리 현실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 기록물일지라도 기록자가 당사자가 아닐 경우 이해의 결핍으로 인해 왜곡이 발생할 수 있으며, ‘삶’이란 직접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직접 겪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직접 겪지 않은 일들은 언론의 보도나 다른 매체 등을 통해 전해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직접 겪지 않은 일, 보도되는 일들에 대해 의심하고 변별적으로 정보를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객관적인 ‘역사 기록물’이라 할지라도 왜곡을 가능케 하는 요소들이 산재해 있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수많은 정보들의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영화 ‘터널’과 흡사한 세월호 사건은 ‘기록’의 한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한 사례라고 생각된다. 언론사들은 시청률을 위한 속보 경쟁과 자극적 내용들로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을 보도했고, 유가족들을 비인간적으로 인터뷰하는 행태를 보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실의 왜곡이 일어났고 사건의 본질까지 왜곡되기에 이르렀다. 언론사들은 당시 이러한 보도 행태로 인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사실을 기록하는 모든 매체들에는 왜곡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도 사건이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팩트’이지만 관점이 다르면 전혀 다른 사건처럼 쓰여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자들은 왜곡을 최소화하기 위해 분명히 노력해야 하지만, 수용자 역시 기록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상 왜곡의 가능성이 불가피하게 존재함을 인지하고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만, 타인의 삶에 관한 한 우리는 그것을 기록하고 전달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더욱 더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노혜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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