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밤공기와 즐기는 인상파 그림

헬로아티스트전
글 입력 2016.08.2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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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날에도 한강의 야경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불어오는 잔잔한 강바람에 즐거워집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야경과 같이 즐길 수 있는 전시가
우리에게 찾아왔는데요, 바로
'헬로 아티스트展'입니다.


헬로 세로형 포스터-01.jpg
 
 
더욱이 이 전시가 기대되는 점은
반 고흐, 마네, 르누아르, 세잔, 드가, 모네, 고갱, 쇠라
총 8명의 거장들의 그림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는 점입니다.
한 화가의 전시만 열려도 큰 이슈가 되곤 하는데
8명의 거장이 모인 전시라니 정말 대단합니다.

전부 인상파 화가들인 만큼 운치있는 야경을 배경으로하고
감성에 젖어볼만한 전시라고 생각되는데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기획의도를 살펴보자면, 이번 전시는 국내 최초 '캐주얼 카페 전시'로서
중국 등 아시아권 국가에 컨버전스 아트를 수출하며
전세계의 한류를 이끌고 있는 '본다빈치'가 준비한 프로젝트입니다.

음료를 마시며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도 즐겁고 입도 즐거운 오감 만족의 전시는
다른 갤러리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한 차별점입니다.


캡처.PNG


전시장 내부의 구성입니다,
감각적인 조명과 IT미디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명화들에 걸맞게 전시장 내부도
관람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전시의 콘셉트는 '마음챙김(Mindfulness)'인데요,
마음챙김이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키워 어떤 문제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해결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특히, 이런 전시의 콘셉트는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로이자
활력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아티스트소개


1. 에드가 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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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현실을 담은 아티스트, 에드가 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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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1876-1877]

1834년 파리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에드가 드가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해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가 되기를 희망하여
국립이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갔다.

18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한 드가는
이 무렵부터 10년간 화가로서의 기본기를 갈고 닦으며 오로지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 1865년 이후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익히던
자연주의 문학이나 아카데미즘에 도전하는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에 이끌리게 된다.
드가는 이 무렵부터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역사화가 아닌
파리 부르주아들의 근대적인 생활상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다.

그는 발레나 승마 등을 즐기는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했다.
특히 인물의 동작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특징을 부각시키며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그 무렵 드가는 동시대 진보적 청년미술가 그룹인 인상파 친구들과 교우하며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했다.
 

2. 오귀스트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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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시대의 낭만과 행복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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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랭 드 라 갈래트의 무도회, 1876]

1841년 프랑스 리모주의 재봉사 집안에 태어난 르누아르는 4세 때 파리에 정착했다.
그는 13세 때부터 도기 화공으로 일하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다니며 명화에 흥미를 느낀 르누아르는
1862년 파리에 있는 샤를 글레르 화실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때 모네와 바지유 등 기존 아카데미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화풍을 추구하는 동료를 만나게 된다.

1869년 모네와 함께 인상파의 기법을 도입한 르누아르는
제1회 인상파전 총감독을 맡는 등 진보적 청년미술가 그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다가 1881년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후, 라파엘로나 폼페이의 벽화에 감동을 받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화풍을 확립하게 된다.

말년에는 남프랑스 카뉴에 정착한 르누아르는 나부와 꽃 등을 감미로운 색채로 그려냈다.
1903년부터는 조각에도 손을 대어 회화와 공통된 풍만한 양감을 창조했다.
1912년부터 류머티즘을 앓기 시작한 르누아르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3. 클로드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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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빛의 화가 클로드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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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an With a Parasol, 1875]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유년기를 항구도시 ‘르 아브르’에서 보낸 모네는
10대 때부터 유명인들의 캐리커처를 팔 정도로 그림의 재능을 보였다.
모네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준 외광파 화가 외젠 부댕을 만나
야외에서 풍경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빛의 변화를 예리하게 캐치하여 화폭에 담기 시작한 모네는 직업화가가 될 생각으로 파리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존 아카데미즘 답습에 반대한 일군의 청년화가들,
피사로, 르누아르, 바지유 등과 교우하며 보수적인 미술계 개혁에 앞장선다.

모네는 이들 화가들과 함께 1874년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때 출품한 작품 《인상, 해돋이》에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는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끝까지 고수한 화가로,
1890년대부터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 끊임없이 탐색했다.
그가 지베르니 정원에서 30여 년 간 그린 연작 《수련》 300여 점은
그의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4. 에두아르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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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새로움을 그린 화가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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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 1863]

인상주의의 개척자로 불리는 인물.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법관인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잠시 견습 선원으로 배를 탔다.
선원이 될 바에는 차라리 화가가 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마네의 아버지는
1850년 아들을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서 수학하게 한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굽히지 않는 반골 기질이 있었던 마네는
스승의 가르침을 다 받아들이지 않고 본인이 생각한 대로 그림을 그렸다.
일찍이 본인만의 독특한 화풍을 확립한 마네는 살롱의 공인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작품을 출품하지만 여러 차례 낙선의 아픔을 맛본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풀밭 위의 점심》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본 모네 등의 진보적 청년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에 열광했고,
그의 영향을 받아 훗날 인상주의 그룹을 결성한다.
끝까지 아카데미의 공인을 바랐던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개최한 전시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그들을 조용하게 응원했다.

그리고 그가 그림을 시작한지 32년째 되던 1881년,
프랑스 정부는 살롱에서 심사 없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메달과
프랑스 최고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마네에게 수여하며 그를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인정했다.


5. 조르주 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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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라, 세상을 점으로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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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

1859년 파리의 법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쇠라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흥미를 느꼈고,
1878년에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며 미술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아카데미 화가로 알려진 앵그르의 제자 H.레만의 지도를 받다가,
다음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브레스트의 해안에서 병역을 마쳤다.
파리로 돌아온 쇠라는 고전 작품을 연구하고 소묘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회화 이론에 몰두한다. 그는색채학이나 광학이론을 공부하며
1881년경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에 대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접목한 점묘화법을 발전시키며 자신 만의 화풍을 확실하게 굳혀 나간다.
그는 동시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무시했던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하며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1884년 점묘화법으로 그린 작품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를 완성하고 살롱에 출품하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곧이어 개최된 제1회 앙데팡당전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6. 폴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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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있는 그림, 폴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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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과 사과바구니가 있는 정물, 1894]

1839년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폴 세잔은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로 법대에 입학했다.
결국 본인의 의지로 1861년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아카데미에서 자신이 다른 학생들만큼 기교가 뛰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 세잔은
심한 우울증을 겪었고, 결국 6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862년 세잔은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결의에 찬 의지로 다시 파리로 향했다.

초기 작품은 대체로 어둡고 거칠었다.
아카데미 화풍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살롱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인상파 전시에 참여했다.

세잔은 4회 전시부터 인상파와 일정 거리를 뒀다.
그는 형태를 탐구하면서 형상과 구도를 단순화하는 화풍을 구축했다.
그리고 명쾌한 색채를 사용하며 원근감과 입체감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 냈다.


7. 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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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유를 그린 화가 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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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히티의 여인들, 1981]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로 분류되는 폴 고갱은 주식중개인으로 일하다
1883년 35세 때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화가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다.

주식중개인 시절 그는 후견인의 친구의 영향으로 미술품 수집을 시작했다.
27세부터는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리는 일요화가회에 가입해 그림을 배웠다.
1876년 살롱에 출품하며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를 시작한 고갱은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전시회 멤버로 활약했다.

1873년 덴마크 여성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한 고갱은 화가로 전향하면서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과의 사이가 나빠졌고,
결국 부인과 5명의 남매는 파리를 떠나 외가가 있는 덴마크로 향했다.

고갱은 원근을 무시한 구도와 평필적 색채를 화폭에 담으며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평단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고갱은 외로운 도시생활에 환멸을 느끼며 프랑스를 떠나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 원주민들의 건강한 에너지에 매료돼
열렬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그의 대표작을 그려냈다.


8.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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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불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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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빛나는 밤, 1889]

1853년 네덜란드 작은 시골마을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빈센트 반 고흐는
어렸을 때부터 진지하고 내성적이며 어린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고 한다.
고흐 부모는 이런 아들을 기숙학교에 보내지만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도 포기하게 된다.

고흐는 1869년 숙부의 화랑에서 일하며 그림을 접하게 된다.
이어 런던과 파리에서도 화랑에서도 일을 하였다.
그러다 돌연 성직자의 길을 열망하며 신학대학 입학을 준비하지만 낙방하였다.

27세가 되던 1880년부터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초기에는 주로 어두운 색채의 그림을 그렸지만
1886~1888년 파리에 머물면서 인상주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작품의 색채가 점차 밝아졌다.
전원생활을 꿈꾸며 찾은 아를르에서는
꼼꼼한 필촉과 타는듯한 색채의 작품을 그려내며
반 고흐 특유의 화풍을 전개시켰다.

1888년, 고흐는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며 동료들을 아를르로 초청했고,
모험심이 강한 고갱은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그 해 12월부터 고흐의 정신병 발작이 심해져
결국 고흐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작품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그리고 1890년 7월 29일 그는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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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하나 거장들의 설명을 읽을 수록
더욱 더 빨리 가고싶은 전시입니다.

셔틀버스가 고속터미널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입장시간도 늦은 밤 10시까지 이니
직장인들도, 학생들도 모두 즐길 수 있는 전시입니다.

하루 정도는 피서를 솔빛섬으로 떠나보는건 어떨까요,
솔빛섬에서의 행복은 이번 여름의 별빛같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PS. 스페셜 프로그램들도 전시에 숨어있으니
아쉽지 않은 전시가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티켓 및 관람안내


화 – 일   : 오전 10:30 – 오후 10:00
월요일   : 오후 6:00 – 오후 10:00(심야시간만 오픈)
입장마감 오후 9:00

문화가 있는 날 : 매월 마지막 수요일 50% 할인


단체는 20인 이상 / 중복 할인 없음
특별할인 대상자는 증빙서류를 지참한 경우에만 혜택 받으실 수 있습니다.
 

교통안내
세빛섬 셔틀버스 
(평일 30분 간격, 주말 & 공휴일 40분 간격)
고속터미널역 6번 출구 ↔ 세빛섬 (순환버스 이용)
평일(월~금): 11시00분 ~ 22시00분 (30분 간격) ※ 16:00~17:00 제외
주말·공휴일: 11시00분 ~ 22시00분 (40분 간격) ※ 16:00~17:00 제외

지하철
3, 7, 9호선 고속터미널역 8-1번 출구
(약 650m, 도보 약 15분 소요) 8-1번 출구로 나와서
반포대교 방향으로 직진하여
고속터미널 사거리(국민은행 건물)에서 우회전 후 직진하여
자전거 매장과 편의점을 지난 후 횡단보도를 건너
잠수교 방향의 지하보도 이용

버스

반포한강공원 하차 : 405, 740

반포대교 남단 하차 : 143, 401, 406

고속터비널 하차

광역버스 : 9408, 9500, 9501, 9510, 9800, 9802

간선버스 : 142, 148, 360, 362, 462, 540, 640, 642, 643

지선버스 : 3414, 3422, 4212, 4318, 5413  



[전혜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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