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예술, 기억 그리고 관계의 윤리 - 연극 단편소설집 후기

글 입력 2016.08.20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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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바쁜 날이었다. 연극을 보러가는 날이 무언가 글을 써야 하는 일로 너무 바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되는데 시간에 쫓긴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계속 뜀뛰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글을 쓰다가, 글이 나를 쓰다가 하는 일련의 줄다리기를 마치고 나니 진이 다 빠져버렸다. 그리곤 오늘 볼 연극을 곱씹어보자, 제목이 단편소설집이다. 스승과 제자, 소설가 두 명의 이야기. 신기한 타이밍이었다. 갑작스레 글 쓰는 일에 지쳐버렸고 지금 난 글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 어떤 이야기로 다가올지 무척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날듯이 달려 혜화로 갔다. 단편소설집의 무대는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일반적인 소극장보다 무대나 좌석 전반이 규모있는 편이었다. 바로 눈 앞에 놓인 작가의 작업실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만 같았다. 곧 불이 꺼지고, 누군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단편소설집의 프롤로그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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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스는 유명한 소설가로 활동하며 교수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느 때처럼 일을 하던 루스에게, 그녀의 팬인 리사라는 학생이 찾아온다. 리사의 글에 재능이 보인다고 판단한 루스는 리사를 제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처음에는 서로 가치관과 성격이 워낙 달라 많이 부딪히기도 했지만 점차 그들만의 접점을 만들어가며 둘도 없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발전한다. 루스에게 몇년간 배운 리사는 단편소설집을 출간하고 단숨에 주목받는 작가의 위치에 오른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금 미묘해지는 둘의 관계. 리사는 장편소설집을 출간해야한다는 강박이 생기고, 루스는 점차 성장해가는 제자를 보는 것이 좋으면서도 씁쓸하다. 시간이 지나 리사는 결국 장편소설집을 출간하지만 루스는 그 소설집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리사에게만 얘기한 시인 델모어 슈왈츠와 자신의 연애담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루스는 자신의 인생을 도둑맞았다고 외치고, 리사는 스승님이 알려준 대로 소설을 썼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두 사람의 갈등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

     순수한 동경으로 반짝이던 맑은 눈. 루스를 볼 때의 리사는 항상 환희에 차 있었다. 루스의 문장 하나하나가 제 인생의 길잡이가 된 양, 리사에게 있어서 루스는 차라리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루스는 그런 리사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들을 쏟아내어 주었고. 이 둘의 관계가 그런 끝을 마주하게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연극의 마지막에 다다르기까지, 루스와 리사의 관계가 점차 변해가는 모습이 인상깊다. 처음에는 다소 낮은 자존감, 말로 꺼내지 않는 진심, 항상 긴장된 태도로 무장해있던 리사가 루스와 부딪히고 감정을 공유하며 관계를 성장시켜간다. 리사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기쁨과 동경에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부터 점차 감정과 관계들에 성숙해지는 모습까지 지켜보는 내내 정말 사랑스러웠다. 루스 역시 자신의 날선 부분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리사에게 조금씩 손을 내밀기 시작한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가장 큰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단단해진다. 그들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게 가장 큰 공통점 때문이라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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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리사의 단편소설집은 하나의 큰 시작이다. 변화의 시작. 단단한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오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이전까지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발전이라고 해야 할지 균열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같은 것들이, 그 미묘한 분위기와 기분과 감정같은 것들이 미세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단편소설집 출간으로 인해 루스는 리사를 스승과 제자의 관계 뿐만 아니라 대등한 친구로써 리사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루스는 제자의 성장이 기쁘면서도 조금쯤 두렵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더는 돌아올 수 없는 시기라는 것을 알기에 그 젊음을 부러워한다. 작은 가시같은 감정이 마음 어딘가에 박히기 시작하자 루스는 알게모르게 상처받는다. 그리고 머지않아 꺠달았을 것이다. 그 가시같은 감정은 가시가 아니라 씨앗이었음을. 반면 리사는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자 작가로서 성장하려는 열망이 생긴다. 그 열망의 다른 이름은 부담감이다. 리사는 더이상 루스의 제자로서가 아니라 리사라는 작가로 발돋움 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루스의 삶을 소설로 쓴 리사는 루스에게 이렇게 외친다. 선생님께서 그 얘기를 제게 해주셨을 때부터, 그건 저의 이야기가 된 것이라고. 그리고 이어서 외친다. 글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라 알려주셨던 게 바로 선생님이라고. 연극은 우리에게 글을 쓴다는 것, 소설을 쓴다는 것, 그리고 예술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만든다. 한 사람이 잉태하여 이 세상에 내어 놓은 것이 바로 예술이라면, 바로 그 소설이라면, 그 것에 대한 소유권, 혹은 양육권, 그 권리같은 것들은 얼만큼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우리는 초월적 존재가 아닌 이상 홀로 무언갈 잉태할 수 없다. 크게 보면 세상, 작게 보면 주변의 일상, 더 작게 들어가면 바로 옆의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얻는다. 그렇게 이야기의 싹이 튼다. 리사는 결국 소설이란 그렇게 세상과 자신이 영향받아 탄생한 것이라고, 그러니 자신의 소설 속 이야기는 스승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스승님의 이야기를 듣고 영감받은 자신의 이야기라고 외친다. 하지만 집필 기간동안 리사가 루스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는 건 그녀가 양심에 찔렸다는 것의 반증 아닌가? 예술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덮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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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갈등의 본질에는 예술이나 권리에 대한 논리가 존재한다기 보단 좀 더 추상적이고 모호한 감정이 존재한다고 느껴졌다. 갈등의 밑바닥에는 다른 잡다한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직 리사와 루스, 이 두 사람, 이 두 글자만이 있다. 같은 공간에 서 있었고 같은 점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 손 닿는 곳에 있는 서로의 존재에 안도하며 그들은 생각했다. 우린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노라고. 그러나 리사는 스승이 홀로 소중히 간직해오던 과거의 기억을 소설의 소재로 사용한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었지만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는 있었다. 루스는 그저 리사가 나이들어가는 병든 자신과 함께 친구로 있어주길 바랐고, 리사는 리사의 기억을 토대로 쓴 글을 통해 루스가 자신의 과거와 직면하게 만들고자 했다. 리사와 루스는 서로를 완전히 다르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변명이든 무엇이든 간에 리사는 리사대로 루스를 믿었고 루스는 루스대로 리사를 믿었다. 루스가 지금까지 시인 델모어 슈왈츠와의 얘기를 가슴 속에만 묻어둔 것은 그녀만의 이유가 있었을 텐데. 작가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루스를 바라봤더라면, 리사는 그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다르게 보면 이 갈등은 둘 사이에 너무도 많은 관계의 얼굴이 있기 때문에 벌어진다. 루스는 리사에게 있어서 종교였고, 삶의 지침이었으며, 스승이었다. 리사는 루스에게 있어서 팬이었고, 친구였으며, 제자였다. 시간이 흐르고 함께 나누는 것이 많아질수록 관계는 깊어진다. 그러나 자신이 관계에 어떤 이름을 매기게 되느냐에 따라 결국 한번 더 시야가 달라진다. 이름에는 힘이 있다. 그렇게 보게 되는 것이다. 자칫 두 사람의 관계가 결국 한 사람의 관계만으로 남을 수도 있다. 우린 서로를 어떤 얼굴로 바라봐야 할지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동시에, 모든 일에는 댓가가 있다는 점 역시. 모든 관계를 다 가질 수는 없다. 리사는 친구를 잃고 작가로서의 다음 계단을 밟은 셈이다.

     연극의 막바지에 이르러 리사가 내뱉는 한마다 한마디 말들이 연극 초반에 루스가 한 얘기라는 점이 정말 소름끼쳤다. 그 둘의 관계는 이미 연극의 처음부터 복선이 깔려 있었다. 소설가의 태도에 대한 것부터 우디 앨런 사건에 대한 견해차이까지 한장면 한장면, 한마디 한마디가 의미깊었다. 연극 단편소설집의 특성상 두 등장인물이 작가이기 때문인지 대사 한마디도 꽉 차 있었다. 한 톨도 놓칠 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중간중간 집필한 글을 읽는 장면에서는 정말 소설을 읽은 양 심취해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배우님들의 연기력에 정말 감탄만 계속 나왔는데, 김소진 배우님의 리사는 특유의 캐릭터 표현과 그 강약 조절이 정말 강렬했다. 전국향 배우님의 루스는 노련하고 세련된 느낌과 나이들고 여린 모습을 오가며 마음을 묵직하게 했다.

     연극 단편소설집. 두 명의 작가, 두 명의 친구이자, 스승과 제자.
     그들은 마치 신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써내려갈 수는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은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정말 꽉 찬 연극을 봐서 마음이 먹먹하다. 내일이 마지막 공연이던데. 한번 더 이 먹먹함을 느끼고 싶어 계속 마음이 동한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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