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신파’의 눈물과 함께 흘러 내리는 대중문화 [문화 전반]

신파적 요소가 아니면 더 이상 대중적 지지를 바라기 힘든 문화 풍토
글 입력 2016.08.1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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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날이면 꼭 눈물, 콧물을 쏙 빼야만 개운해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집안에서 방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조명을 어둡게 한 뒤, 휴지를 충분히 준비하고는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았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 한결 살 만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가 보았던 영화와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읽거나 듣거나 보고 있자면, 군대에서 겪었던 화생방 훈련이 생각난다. 맵싸하고 울컥하는 서사들이 코와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 안에서는 울어야만 한다. 실컷 울어야만 모든 것이 끝난다.

 오늘날 ‘신파’라는 말은 흔히 슬픔을 자극하여 눈물을 짜내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을 비하할 때 쓰인다. 그것이 일제 강점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역사적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그 단어가 내포하는 일련의 정서에 관해서는 대중적 공감대가 형성된 듯하다. 이야기에 신파성이 엿보이면 ‘유치하다’거나 ‘막장이다’라며 손가락질하지만 정작 그러한 작품의 대중적 성과는 매번 신기록을 갈아치우기 일쑤다. 영화 ‘7번 방의 선물’이 대표적인 예이다. 최근에는 영화 ‘부산행’이 신파적 결말이라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안정적으로 천만 영화에 안착했다. 안방극장의 미니시리즈나 일일드라마 등에서도 지지고 볶는 신파적 요소가 많지만, 오히려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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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극 ‘홍도야 울지마라’.


 ‘신파’라는 장르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신파는 민중들의 현실적 삶과 고통, 애증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역할을 해왔다. 필연과 우연의 굴레에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이 고독하게 분투하며 자아내는 삶의 비극과 카타르시스는, 운명에 대해 냉소 지을 수 있게 된 포스트모던의 감성에서는 촌스럽다 할 수 있지만, 그 장르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근래 대중 문화 전반에서 쏟아져 나오는 작품들의 신파성은 이러한 매력과는 동떨어진 듯 보인다. 특히 이것이 하나의 관습과 법칙으로 자리잡고 대중적 흥미를 끌어내기 위해 무분별하게 일종의 공식으로 작용하는 현상은 우려스럽다.

문화 예술이 점차 고도로 산업화 됨에 따라, 각각의 분야에서 대중적 흥행을 이끌어내는 방식 역시 체계화 되었다. 이른바 ‘흥행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영화나 드라마의 서사에서 흥행을 주도하는 도식으로 코믹, 신파, 가족, 애국 등을 꼽는다. 그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찍어내듯 이야기를 만들어도 대중은 매번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신파적 요소는 빠질 수 없는 공식이다. 감동적 요소를 서사 곳곳에 부비트랩처럼 설치하여 관객들의 눈물샘을 터뜨려야만 더 많은 관객들이 몰려든다. 문화를 산업으로, 수익 구조로만 바라본다면 이처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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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7번방의 선물’의 한 장면.


 그러나 위와 같은 ‘흥행 공식’에 의한 창작은 작품의 질을 해하고 예술 생태계를 병들게 할 주범이 될 가능성이 높다. 상업적 수요에 의해 작위적으로 개입된 요소들은 전반적인 서사나 주제, 분위기에 어우러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객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려는 시도들을 극단적으로 목표로 하면 서사의 개연성이나 작품의 완성도를 훼손할 수 있다. 이는 이야기가 지닌 구조적 완결성을 와해하고 그 속에 내포되어 있던 본질적 가치들을 흐리게 한다. 즉, 작품을 망가뜨린다. 아울러 천편일률적으로 공식에 짜맞춰진 콘텐츠 생산은 결코 문화 예술계를 발전시킬 수 없다. 예술의 핵심 가치인 ‘다양성’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극장이나 브라운관, 책꽂이에 신파물, 코믹물, 가족물 등으로만 가득한 세상은 건강한 예술 생태계가 형성되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중문화에서는 위와 같은 도식화된 작품들에 최적화된 결과들이 나타난다. 근래의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장르를 불문하고 신파적 요소가 곳곳에서 눈물샘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대중적 취향은 흥행 공식에 번번히 휩쓸린다. 이를 방지하고 보다 독립적이고 다양한 문화 예술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구조적으로 소수의 대자본이 견인하는 시장 구조를 개편하고, 창작자의 개성과 재량권이 보장되는 제도적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창작자들이 계속해서 낯설고, 불편하고, 생소한 무언가에 대해서 도전하는 동시에 대중적 관심의 저변 역시 확대되어야 한다. 이는 보다 잦고 활발한 문화 예술 관련 홍보 및 기회 제공 등이 행정적으로 뒷받침될 때 보다 탄력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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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반 경성의 신파극 공연장 풍경.(1925년 8월 27일자 조선일보)


 국어 사전에 따르면 ‘통속적이다’라는 말은 세상에 널리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쁨, 슬픔, 분노 등 모든 예술이 비추고자 하는, 인간 내면의 모든 감정들은 거시적으로 통속이라 할 수 있다. 신파적 장르가 표현하고자 하는 통속성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비극을 위한 비극, 울음을 위한 울음을 억지로 끌어내려는 시도들은 화생방 훈련장의 연기처럼 매캐하다. 비극과 울음, 슬픔, 환희 등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이 형형색색으로 현현하는 순간을 보고 싶다.

 보다 다양한 인간의 모습, 세계관 등이 표현되어 관객들을 성찰하게끔 한다면, 그것은 장르를 초월하여 예술이라 일컬어질 만하다. 신파를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코를 풀 때 쓰는 손수건 정도로 사용하고 버리지 않으려 한다면, 더 이상 신파가 눈물 짜내기 식의 유치한 통속극이라는 비아냥으로 전락할 일도 없을 것이다.


[최연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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