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피리 부는 사나이와 가난한 예술가들 [문화전반]

피리 소리를 깨고 구조적 모순을 직시해야 낭떠러지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글 입력 2016.07.2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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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가 가난에 허덕인 역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미술책에 거론되는 예술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일생을 궁핍하게 살았다. 고흐, 르누아르, 모딜리아니, 브라크 등 해외 사례부터 박수근, 이중섭 등 국내 사례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그들의 작품들은 시장에서 고가의 명품이 되어 거래된다. 피카소와 같이 예술가가 생전에 작품을 통해 인정받고 자본을 모을 수 있는 경우는 복권에 당첨될 수준의 행운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많은 젊은 예술인들이 계속해서 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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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모딜리아니의 한 장면, 영화를 통해 가난했던 그의 생을 회고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라는 책을 저술한 경제학자이자 시각예술가인 한스 애빙의 인터뷰는 논의할만한 담론을 던져준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자신의 예술 활동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 수준이 빈곤선 이하인 비율은 전체 예술가의 40% 정도"라며 "예술가의 94%는 노동자의 평균 수입 이하"라고 언급했다.

 이어서 "고작 6%의 예술가만 예술계에서 명성도 있고 부도 있는 셈이죠. 경제학자들은 예술가들이 수입이 낮아도 (작업을 해서) 행복하니까 그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수입이나 명성 등 모든 게 낮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상위에 속하는 소수에 포함되지 않는 이상 결국에는 다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죠."라고 말했다. 즉, 수입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예술을 시도하는 열정페이가 예술업계의 구조적 착취로 악순환 된다는 것이 한스 애빙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어떠한가. 한스 애빙은 정부의 지원은 해답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는 예술가들이 정부 지원을 받으면 더 이상 시장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정부 지원은 예술가들의 경쟁을 왜곡하고 예술계의 빈곤현상만 심화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예술가들 스스로 연대함으로써 자신들을 착취하려는 이익집단들과 구조적 모순에 맞서야 한다. 이는 정부의 지원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예술적 자유를 방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도 귀 기울여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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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몽마르뜨 거리에서 그림을 판매하는 예술가.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예술이 처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것은 자칫 무책임한 방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예술과 노동의 관계나 예술 시장의 질서에 대한 합의가 제대로 다져지지 못한 상태에서, 무조건적인 자구책을 주장하는 방향성은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때문에 예술가들이 연대하고 힘을 기를 때까지 이들을 보호하고 육성할 제도적, 행정적 안전망도 필요하다.

 아울러 예술가들 스스로도 노동으로서의 예술에 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예술가는 직업이며, 직업이라면 노동을 통해 생존권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자리 수밖에 되지 않는, 피카소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나머지 모두가 궁핍해야 하는 현실을 감안하는 식으로는 예술업계가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할 수 없다. 스스로의 작업 활동을 권위 있는 노동 행위로서 자각하고, 그에 합당한 가치와 보수, 직업적 자유를 보장 받기 위해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흐름에 힘을 싣기 위해서는 예술 업계 안에서 상생과 공존을 위해 서로 계속해서 협의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한국 사회 전반에 드리운 양극화의 그림자는 예술 업계라고 예외로 두지 않는다. 음악, 미술, 영화, 연극 등 예술 분야 전반에서 승자 독식 체제의 수익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그것이 마땅한 경쟁이라고, 당연한 결과라고, 그렇지 않으면 개나소나 예술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상위 몇몇 이들만이 살아남는 생태계를 건강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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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최고은 예술가. 그는 지독한 가난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5년이 넘은 지금, 한국 영화계 그리고 예술계가 관련 종사자들에 대한 대우를 얼마나 개선했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쉬쉬한 채, 열심히 하면 파라다이스가 열릴 거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말들이 심심찮게 들린다. 독일의 전래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생각난다. 사나이는 피리로 쥐를 꾀어 강물에 빠뜨리고 나아가 아이들을 납치한다. 누가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어 가난한 예술가들을 벼랑에 몸을 던지게 만드는가. 뛰어내린 이들의 삶을 제물 삼아 누가 이익을 취하고 있는가. 

 저명한 예술가들이 예술의 숭고한 가치에 몸을 던져 인류 역사에 기억될만한 유산들을 남겼다. 지금 혹은 다음 세대의 예술가들에게도 기꺼이 몸을 던져 숭고함을 쟁취하라고 권장할만한 사회가 오길 바란다.


[최연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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