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곡성, 의심과 확신의 무한변주 [시각예술]

글 입력 2016.07.2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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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포스터.jpg
 

<곡성>에서 명확하게 확신과 의심의 변주가 시작되는 첫 지점은 종구(곽도원)가 무명(천우희)을 마주하는 장면이다. 종구는 여인을 따라 사건현장으로 들어가게 되고 소문으로만 듣던 좀비를 마주한다. 좀비에게 공격받는 순간 종구는 꿈에서 깨어난다. 우리가 이 영화를 믿는다면, 우리가 본 이미지의 조합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종구가 좀비의 공격을 받은 것은 종구의 꿈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이 장면이 종구의 꿈이라고 ‘확신’ 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가 종구의 꿈이었을까? 무명을 처음만난 순간부터? 사건현장으로 따라들어간 순간? 좀비에게 공격당한 순간?
 

돌던지는 무명.jpg
 

우리가 이 장면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꿈의 진실 여부가 아니다.(무명에 의해 영화 후반부에 꿈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 오히려 이 장면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불확실성’이다. 하지만 이 불확실성은 우리의 확신(이것은 종구의 꿈이라는)에 가려져 있다.
 
종구와 여인의 악몽과도 같은 만남에서 시작된 확신과 의심의 변주는 계속된다. 영화 초반부 많은 의문점들이 수면위로 떠오르지만 우리를, 종구를, 서사전체를 끌어 당기고 있는 의문점은 일본인(쿠니무라 준)에 대한 의문점과 공포들이다. 우리가 일본인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일본인의 ‘육체성’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귀신은 육체성이 없다.(통상적으로 귀신은 뼈와 살이 없다고 생각한다.) 등장인물 중 누구도 일본인의 육체를 느낀적이 없다. 일본인의 집에 무단침입 했을 때도, 분노한 종구가 곡괭이를 들고 일본인을 위협할 때도 육체적인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커져만 가는 의문과 공포들은 일광(황정민)이 ‘일본인은 귀신이다’라는 말로 확정적이게 된다.

 
일본인의 육체성.jpg
 

우리의 확신(일광이 확신시켜준)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일본인의 육체성을 강렬하게 체험하는 순간이다. 종구 일행은 일본인을 추격하는데 실패하고 산비탈을 따라 내려온다. 종구는 운전도중 엄청난 충격과 함께 커다란 물체와 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이 일본인의 육신임을 알게된다. 의심의 근원이었던 일본인의 육체성을 우리는 그 누구의 육체보다 강렬하게 체험한다. 우리의 확신(일본인이 귀신이다)은 의심(일본인이 귀신이 아닐 수도 있다)으로 변질되고 그 의심은 또 다른 의심(무명이 귀신이다)으로 나아가며 확신(무명이 귀신이다)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후 무명이 귀신이라는 여러 증거들을 마주한다. 종구의 갈등이 최고조로 이르는 순간은 일광과 통화를 하면서 무명과 마주한 순간이다. 종구가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무명은 종구의 팔을 잡는다. 일본인을 의심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무명이 귀신이다’라는 확신을 하려는 순간 우리는 또 다시 무명의 육체성과 마주한 것이다.

 
황정민과 곽도원.jpg
 

앞서 언급한 내용들은 <곡성>의 커다란 서사적 줄기들을 확신과 의심의 반복으로 바라본 시선이다. 이 시선에는 공통점들이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들과 이미지들의 병치(몽타주)를 믿었을 때 생겨나는 확신과 의심들이라는 점이다. 일반 대중들은 영화 이미지들을 믿는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지들의 병치(편집과정)를 통해 전달하는 서사를 믿는다. 과장하면 그것을 보기 위해 영화를 본다. 또 다른 예시를 하나 더 얘기해보자. 일광이 일본인에게 살을 날리겠다고 하며 굿을 벌인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일광이 일본인에게 살을 보내는 굿판과 또 다른 의식을 치르고 있는 일본인의 대결처럼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보이도록 일광과 일본인의 의식들이 교차편집되어 있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이 장면이 둘이 대결하는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광의 굿이 일본인에게 살을 보내는 것이라는 증거는 일광의 말 뿐이다. 더욱이 일본인은 자신에게 날아온 살을 방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인은 살을 방어하는 주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일으켜 세우는 주술을 실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둘의 의식이 같은 시간에 행해지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즉, 일광의 말과 교차편집되고 있다는 것 말고는 둘이 대결을 펼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둘이 대결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는 혹은 보여지는 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굿판.jpg
 

<곡성>의 서사와 이미지들은 사건의 정답을 내놓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서사가 진행될수록 정답에 다다르길 실패한다. 서사에서 정답을 찾지 못한 우리는 서사밖의 요소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끝까지 정답을 원하는 우리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서사밖의 요소들이다. 이제 우리의 의심 범주에는 영화의 이미지와 몽타주까지 포함된다. 영화의 말미, 일본인이 악마의 형상으로 변하가는 모습은 확실히 스크린에 담겨 있다.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와 몽타주를 믿는다면 이것만큼 확실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어디에 있는가. 그럼에도 영화가 끝난 후 '악마였던 일본인이 모든 일의 배후네' 라고 속시원하게 생각했던 관객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영화에 나타난 몽타주와 이미지들을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지와 몽타주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곧 영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관객들은 영화의 허구적 특성을 부정하는 전제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단적인 예로 마블영화를 보면서 진정성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영화가 구현해 내는 매력적인 허구의 세계에서 한발짝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나홍진은 <곡성>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관객들에게 질 수 없는 게임을 걸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곡성>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는 나홍진이 던진 미끼를 잡는 행위와 다름없는 것이다.







[조선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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